241. 홍시 20231017
뉴스를 보다가 감을 발견했습니다. 눈을 유혹하는 납작한 감입니다. 햇살을 마음껏 먹은 듯 반들반들 윤이 납니다. 보는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갔습니다. 감 특유의 단맛이 입안에 감돕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린 광고입니다.
고향 집 감나무가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이맘때면 수시로 감나무를 오르내렸습니다. 가지 사이에서 푸른 색깔을 띠고 숨어 몸집을 키우던 감이 하늘이 파래지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눈에 뜨일 듯 말 듯 누르스름해지더니 점차 노란색을 띠고 드디어 붉어졌습니다. 하늘에 박힌 별처럼 또렷한 얼굴입니다. 푸른 하늘과 붉어진 감은 서로 대비되어 시선을 빨아드립니다. 감잎도 울긋불긋 단풍이 들면서 한잎 두잎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점차 잎이 떠나자, 감은 제 홀로 가지를 차지합니다.
무서리가 내리면 나무에 별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나무를 오르내리며 익은 감을 따 먹고 아직 맛이 덜 든 것은 가지를 꺾어 햇볕이 잘 드는 조금 굵은 가지에 매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숙성이 됨을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매일 한 개씩 익은 감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 가을에는 홍시를 사 먹으면 좋겠어요.”
출근하면서 텔레비전에 비치는 감을 보고 아내에게 지나가는 말을 했습니다. 흘려듣지 않았나 봅니다. 며칠 후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색깔 고운 홍시 두 개가 가지런히 놓였습니다. 며칠을 두고 먹었습니다. 매일 주기에 물었더니 한 상자를 샀다고 합니다. 모처럼 뭔가 먹고 싶다기에 넉넉하게 준비했다는군요.
나는 ‘홍시’하면 늘 할머니를 떠올립니다. ‘할머니와 홍시’ 어울립니다. 홍시가 맛을 더하듯 할머니도 세월을 따라 익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할머니의 깊은 손자 사랑은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다를 것 없지만 그 크기는 더 깊을 것 같습니다.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날, 내가 할머니와 뜀박질했습니다. 앞서고 싶은 마음에 걷는 듯 달리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달렸습니다. 할머니는 나를 앞세우고 싶었습니다. 욕심이 과했을까요. 그만 몇 발짝 달아나다 넘어졌습니다. 돌부리에 차이고 말았습니다.
‘아이코’
할머니의 소리를 들으며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 데 목청은 크게 떨렸습니다. 그 순간 왜 울었을까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되돌아보니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나 봅니다. 할머니는 내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넘어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손발을 살피셨습니다. 옷에 묻은 티끌을 떨었습니다. 갑자기 외치셨습니다.
“에이, 이놈의 돌부리가 우리 귀여운 손자의 발을 걸었어.”
할머니는 돌부리를 향해 소리치며 발을 쾅쾅 굴렀습니다. 할머니의 손이 내 눈물을 훔쳤습니다. 나머지 눈물은 치마폭으로 닦았습니다.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사립문을 들어섰습니다. 향한 곳은 광입니다. 할머니는 큰 독의 뚜껑을 열고 홍시 한 알을 꺼냈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비밀이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나는 홍시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니와 나와의 대단한 비밀입니다. 내가 첫 개시를 했는지 모릅니다. 겨울철 귀한 손님이 오면 대접할 물건이고, 명절 차례에 올릴 과일입니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 맛보는 홍시를 잊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의 추억들은 점점 기억에서 하나둘 멀어지고 있지만 홍시의 추억만큼은 가을과 겨울을 따스하게 하고 있습니다.
늙음은 곧 소멸을 의미합니다. 나도 그 길을 걷는 중입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닙니다. 추억이 쌓인 감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를 먹자, 감이 열리는 양이 줄어듭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감나무 접을 붙여야 할까 보다.”
“그렇지요! 어머니.”
삼촌도 같은 생각이었나 봅니다. 감나무 옆 몇 미터 되는 곳에 고욤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접을 붙이려고 다른 곳에서 가져다 심은 것입니다. 삼촌은 따스한 봄이 되자 감나무의 가지를 잘랐습니다. 고욤나무의 줄기를 잘랐습니다. 곁에서 접붙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 후년쯤이면 감이 열릴 거야.”
처음에는 줄기가 약해 열리는 감을 따주어야 한답니다. 앞으로 몇 년 후부터는 감다운 감을 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묘 차 고향마을을 찾았습니다. 정든 나무는 할머니처럼 보이지 않고 옆자리의 감나무가 어느새 노년의 모습입니다. 할머니의 홍시처럼 붉은 열매가 하늘에서 내려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