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발길이 머무는 곳에 20231103
10월 말의 단풍이 무르익었습니다. 요즘 멀리 산행하지 않아도 집 주변의 공원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눈요기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종류가 많아 물드는 잎들의 색깔이 다양합니다.
오늘은 보통 때보다 배움터에서 늦게 집으로 향했습니다. 공원과 공원을 이어주는 구름다리를 지날 때입니다. 석양이 한창 주변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다리 위에서 차도를 향해 눈을 돌렸습니다. 지나는 차들이 일정 구간을 지나는 동안 제 옷 위에 새 옷을 입었다 벗습니다. 반투명의 옷입니다. 진노랑, 옅은 노랑, 밋밋한 노랑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 걸쳐보며 자랑합니다. 색감에 우둔한 내가 ‘멋져’하는 입안의 말을 밖으로 쏟았습니다.
잠시 차에 머물던 눈을 돌려 가로수에 마음이 갔습니다. 차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처럼 또 다른 아름다움이 시신경을 자극합니다. 한낮에 보는 단풍이 아닙니다. 노을에 싸인 잎들은 각각의 색깔이 또렷합니다. 수채화의 진한 물감을 덧칠했다고 하면 좋습니다.
요즘은 단풍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보는 재미, 만지는 재미, 밟는 재미가 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수채화가 그려집니다. 단풍을 어루만지면 손가락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처럼 곧 색이 변할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낙엽을 밟으면 곡을 연주하는 느낌이 듭니다. 불협화음이긴 해도 귀를 즐겁게 합니다.
벤치를 보자 등에 메고 있던 책가방을 벗었습니다. 조끼를 벗었습니다. 긴 셔츠도 벗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만두었습니다. 이마저 벗게 되면 민소매의 옷이 드러납니다. 이 계절에 뜀박질하는 것도 아니고 보면 남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만 같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11월이고 신사복 바지를 입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손의 움직임이 잠시 잠깐, 시원한 공기가 내 몸을 감쌉니다. 후텁지근한 땀을 몰아냅니다. 더 시원해지고 싶어 셔츠의 앞 단추를 몇 개 풀고 싶게 들썩입니다. 공기가 가슴을 돌고 겨드랑이를 지나 등으로 향합니다.
‘이 맛이야.’
갑자기 동해의 바닷물이 몰려옵니다. 깊어져 가는 가을에 해수욕장을 가져오다니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하늘이 눈을 덮었습니다. 파란 하늘이 갑자기 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날 민통선 가까이에서 무서움도 모르고 바다에 빠져 금강산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뱃멀미에 속이 울렁거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자, 선장이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켰습니다. 나는 수영을 잘할 줄도 모르면서도 물 위에 뜨는 것만은 자신이 있다는 마음에 몇십 분 동안 물속에 머물렀습니다. 잔잔한 물결은 갑판보다 편했습니다.
‘민통선 앞 깊은 바다에서 수영하며 금강산의 단풍을 구경한 사람은 나와 보라고 해.’
홀로 우쭐해집니다.
집으로 돌아와 뉴스를 보았습니다. 내가 더웠던 이유가 있었군요.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내 눈앞으로 지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겉옷을 벗어 손에 들었거나, 허리에 질끈 맨 모습이었습니다. 요즘 날씨가 이상기후 때문이랍니다. 서울 도심을 지나는 사람 중에는 반소매를 입은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였습니다. 한낮의 기온이 초여름 날씨라고 했습니다.
덧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올해는 단풍이 예년에 비해 곱지 못하다고 합니다. 이상 기후로 인해 더 추워져야 할 시기가 뒤로 미루어지다 보니 잎의 색소가 짙어지지 못했습니다. 지난해와는 반대의 현상입니다. 작년에는 11월이 되자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두꺼운 옷을 부랴부랴 꺼내 입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뉴스를 듣는 순간 잊어버린 지난해의 고운 단풍이 올해의 아름다움을 슬그머니 밀어냈습니다. 잠시 휴대전화를 열었습니다. 생각할 사이도 없이 손가락이 먼저 지난해 찍어둔 가을 사진들을 불러옵니다. 올해의 단풍 사진과 비교를 합니다.
‘맞아, 지난해의 단풍이 더 곱군, 아니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
눈이 오락가락합니다. 마침 한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찍은 사진이 있기에 서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곳을 골라 찍었기에 둘 다 멋져 보입니다. 사진이라서 그럴까요? 크게 변화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올해의 단풍이 지난해의 단풍보다 못하다는 말이 그럴 것 같기도 하고, 남에게 듣고 보니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 눈이, 내 기억이 정확하지 못하거나 남의 말에 휘둘리는지는 모릅니다.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작년과 올해의 기온 차이는 분명히 컸습니다.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발표된 뉴스이기는 해도 올해의 단풍이 지난해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내일과 모레는 비가 많이 내리고 이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곧 단풍잎이 힘을 잃고 옅은 춤을 출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담는 눈은 내년을 위해 쉬게 하고 낙엽 밟는 발을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발바닥이 내는 소리 ‘사각사각 사가각, 바스락 바스스락, 바작바작 바자작,
바람이 어우르는 소리 ‘사르르 사르르르, 사르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