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264. 아직도 이고 진 20231114

by 지금은

변덕스러운 날씨입니다. 상강이 지났습니다. 입동이 찾아옵니다. 며칠 전만 해도 길에는 반소매 차림의 사람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체감 온도가 영하입니다. 나야 체감 온도가 뭔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기상 예보관의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나는 실제 온도를 중요시합니다.

수인선 수원역 승강장에 내렸습니다. 환승해야 합니다. 이정표를 따라 걷습니다. 앞선 어느 노파와 젊은 여인의 보따리가 무거워 보입니다. 노파는 불룩한 배낭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손에는 작은 물건이 들려있습니다. 곁에 붙어있는 여인의 양손에는 넘칠 것만 같은 쇼핑백 들려있습니다. 힘이 들어서인지 걸음걸이가 늦습니다. 뒤따르던 나는 어느새 앞장섰습니다. 빨리 걸어서인지 더운 느낌이 들어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겉옷의 단추를 풀고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들을 뒤에 세우고 걷는 꼴이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세요?”

“천안으로 가는 1호선을 타야 하는데.”

그들은 조금 전 나와 함께 수인선을 탔습니다. 칸이 다를 뿐 함께 타고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수원역입니다. 노파는 초행길이거나 아니면 주변의 모습이 낯설어서인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수도권 전철의 1호선 승강장을 찾아갑니다. 처음에는 이들이 서로 아는 사이인 줄로 알았습니다. 말하는 투나 함께 하는 모습이 딸이나 며느리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노파와 에스컬레이터를 올랐지만 복잡한 구조에 자신도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입니다. 1호선 전동차 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느냐 묻습니다. 나는 말 대신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내가 화장실을 들렀다 다시 걸음을 빨리했을 때 그들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여인이 나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화장실을 다녀왔나 보다 했습니다. 곧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인의 말씨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알고 보니 중국 교포입니다. 노파가 길에 익숙지 않아 안내하는 중입니다.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났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같으니 전철 안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짐을 받아서 들었습니다. 무겁습니다. 여인은 자기 부모를 맡기기라도 하는 양 절을 꾸뻑하고 돌아섰습니다. 집이 멀어 보입니다. 역전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고 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저 멀리 있습니다. 짐을 들었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파의 걸음은 나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쉬엄쉬엄 발걸음을 멈추고 심호흡합니다. 그때마다 멈춰 서서 곁에 다가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들고 어디를 찾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디어 전동차의 맨 앞 승강장에 이르렀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하며 고개를 숙입니다. 차가 도착할 시간이 10여 분이나 남았습니다.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서정리라고 합니다. 딸과 아들, 며느리 생각나서 이것저것 챙겼답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좋지만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든 …….’

송강 정철(1536~1593)의 시조가 생각납니다. 학교에 다닐 때 옛시조를 외웠습니다. 암기하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시험 때문이지만 어린 시절의 머리가 아직도 살아있나 봅니다. 몇몇 옛시조는 떠올리는 순간 머릿속에서 뛰쳐나옵니다. 선이나 근면함을 강조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시조에 관해 설명하신 선생님은 효도가 만본의 근원이라고 하셨습니다.

노파의 말씨는 곱고 인자한 얼굴이지만 손마디는 굵고 손등은 거칠었습니다. 손톱 밑에도 흙 때가 끼어있습니다. 어느 고장인지 모르겠으나 아직도 근면함을 감추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식 사랑과 부지런함을 평생의 일로 삼고 살아왔으니, 몸이 쇠약해져도 습관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자신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을 접어두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몸 죽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내가 고달파도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면, 나 한 몸 힘들어도 가정이 평안하다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열정이 숨어있어 사회는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가정이 유지되어 온 이유입니다.

자식들은 알까, 부모의 마음을. 젖먹이나 성장한 자식이나 늘 물가에 내놓은 심정인 것을……. 세대 차이가 물씬 나는 세상입니다. 그까짓 것 사 먹으면 되는데 힘들게 뭘 끌고 왔느냐 핀잔이나 듣지 않을지 은근히 걱정됩니다. 딸과 며느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을 아닙니다. 핀잔 대신 어머니의 손을 자신의 두 뺨으로 어루만져 주면 좋겠습니다. 의자에 앉자, 눈을 감고 조용히 그림을 그립니다. 다정한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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