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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

307. 아직도 눈 내리는 밤이 좋아 20231213

by 지금은

나는 눈 내리는 달밤이 좋습니다. 초승달을 채울 듯 내리는 눈, 반달 위에 내리 앉을 듯 내리는 눈, 보름달 위에서 미끄러지듯 빗겨 내리는 눈,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몰아내고 적막을 깨뜨리며 내리는 눈……. 나는 그렇게 눈이 내리는 달밤을 좋아합니다. 눈이 살포시 내려도, 비가 내리듯 억수같이 내려도, 콩, 팥을 타작하듯 쏟아지는 우박도 싫지 않습니다.

달이 뜨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사립문을 나서 동구 밖까지 발걸음을 옮깁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없었습니다. 토끼털 귀마개를 하고 모자를 눌러썼습니다. 고무신을 신은 채 눈을 골라가며 밟습니다. 이미 발목까지 내린 눈은 내 신발을 그냥 둘 리 없습니다. 남이 밟은 발자국을 조심스레 찾아 짚어갑니다. 잠시 달을 보지 못했습니다. 발자국에 신경을 쓰다 보니 눈은 자연 발밑을 향하게 됩니다. 얼마를 지났을까, 우리 밭둑을 지날 때입니다. 헛기침 소리가 들립니다. 눈을 들었습니다. 아랫집에 사는 어른입니다. 약주를 하셨군요. 냄새가 새하얗게 번져옵니다.

“이 늦은 밤에 어디를 가니?”

“심심해서요.”

“애들이 심심할 게 뭐람.”

말수가 적은 아저씨는 불쑥 한 마디 던져놓고는 나를 비켜 가셨습니다. 머리에 새하얀 눈이 쌓였습니다.

동구 밖에 이르자 내리던 눈이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왕 왔으니, 개울을 건너 학교 앞까지 가볼까. 하지만 그만두었습니다. 서낭당을 지나는 게 무섭습니다. 낮에도 무서울 때가 있는데 이 밤에는 분명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저 서낭당만 없으면 학교 운동장을 혼자 달려보고 싶습니다. 지금이 좋은 때입니다. 친구들과 달리기 하면 늘 꼴찌인 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음 놓고 달려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주춤주춤 개울을 건넜습니다. 언덕을 올랐습니다. 마음은 학교로 향하기 싫은데 발은 자꾸만 내 몸을 앞으로 끌어당깁니다. 달이 나를 보고 웃습니다. ‘정말 학교로 가는 게 맞지’ 정면으로 길을 밝혀줍니다.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깁니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내린 눈이 어느새 남은 발자국을 지워버렸습니다. 산모퉁이에 이르렀습니다. 20여 미터를 가면 서낭당입니다.

‘우지직’ 소리와 함께 눈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앞에 보이는 소나무 가지가 부러져 내립니다. 새 한 마리가 놀라 소리를 지르며 건너편 산을 향해 날갯짓을 합니다. 머리칼이 쭈뼛해집니다. 나도 모르게 발을 멈췄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돌아설까요. 무섭습니다. 앞으로 나갈까요. 무섭습니다. 달을 쳐다봅니다. 핼쑥한 얼굴입니다. 놀랐나 봅니다. 안 되겠습니다.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놓습니다. 누군가 내 뒤꽁무니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듭니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나타나 눈을 휩쓸어갑니다. 개울을 향해 달립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징검다리를 건너자 논두렁 밑의 가장자리를 방패 삼아 돌아섰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분명 누군가가 뒤를 쫓아 돌다리를 건너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안심이 됩니다. 천천히 발길을 옮깁니다.

발이 시립니다. 눈이 신발을 그대로 둘리가 없습니다. 안을 파고들었습니다. 양말이 젖었습니다. 발이 축축합니다. 무엇을 쫒다가 놓친 사람처럼 힘없이 집으로 향합니다. 처음과는 달리 달의 모습이 우울해 보입니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너는 왜?”

“심심해서.”

어느새 나타났는지 친구가 나를 마중이라도 나온 듯 반깁니다. 그러고 보니 마음 한 구석이 통하나 봅니다. 가까운 친구네 집으로 향합니다. 달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우리 고구마 구워 먹을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집에 이르자 친구는 화롯불에 고구마를 넣었습니다. 나는 젖은 양말을 벗었습니다. 신발을 털어냈습니다. 달이 어느새 따라와 벽을 밝힙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펼칩니다. 며칠 있으면 개학입니다. 글짓기는 잘 했느냐, 만들기는 했느냐, 관찰 일기는 빠짐없이 썼느냐……. 고구마가 익어갑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고구마 타는 냄새가 코를 간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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