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한 주를 보내며 20231215
비가 내립니다. 겨울비치고는 제법 굵은 빗줄기입니다. 어제오늘 비의 양이 많을 거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밤새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습니다. 잠에서 깨 빗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잠이 들 것 같지 않아 침실을 살그머니 벗어나 거실로 나왔습니다. 하늘은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넓은 유리창을 의지하고 주르르 주르르 눈물을 쏟아냅니다. 나를 보아 달라는 듯 벽을 두드리기까지 합니다. 폭풍에 도토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듯 콩닥콩닥 소란을 떨고 있습니다. 손을 가져가 유리창을 어루만졌습니다. 축축한 물기가 닿는 듯 차가움을 느꼈지만, 손바닥에 매달린 것은 느낌뿐입니다.
어느 해 월요일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비가 내렸습니다. 뒤숭숭한 밤입니다. 가뜩이나 월요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때입니다. 직장을 다니던 나는 월요일의 아침이 찾아오는 게 싫었습니다. 또 일주일을 견뎌야 하는 거야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막상 출근하여 지내다 보면 언제 하루해가 지났나 하는 마음이 들지만, 반복되는 일상이 때로는 지루하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어떤 때엔 하루가 유달리 길게 느껴지는 날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시기에는 한 주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는 날도 있습니다. 지난날의 일주일을 돌이켜보니 대체로 월요일의 하루는 느리게 가는 편이고 수요일을 정점으로 시간이 점점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다가오는 토요일 밤부터 주말은 그 어떤 때보다 짧게 생각됩니다. 지금과는 달리 나의 직장 생활은 토요일 오전까지였을 시기입니다. 마음의 시곗바늘은 느리고 빨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아무래도 직장인의 시간 주기는 주말에 맞춰서 변동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월요일 아침이 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특히 오늘같이 일기가 불순한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먹구름이 낀 날, 비가 내리는 날, 아침부터 더위가 찾아온 날, 찬 바람이 부는 날, 서리가 새하얗게 배추 머리를 덮은 날, 눈이 내려 미끄러운 날, 이유 없이 마음이 울적한 날, 밀린 업무가 기다리는 날. 창밖의 빗물을 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빗물에 섞여 옛 생각이 하나둘 유리창을 타고 밑으로 더 아래로 흘러갑니다.
늦잠이 들었습니다. 깨어보니 식탁에는 아침밥이 차려 있고 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내가 식탁에 앉아 어제 다 못한 장미를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어제 피곤했나 봐요.”
잠자리에서 깨어나 어두운 밤을 서성인 것을 알지 못했나 봅니다. 잠귀가 밝은 사람이지만 그림자 없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예전 같으면 아침을 생략한 채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긴 시간입니다. 아니 직장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식사가 끝나자, 저 멀리서 꾸물대는 버스 대신 구수한 둥굴레차가 앞에 대령했습니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여보, 어제 볼일이 있는데 까먹었다며 오늘 간다고 했잖아요.”
“아차, 당신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네.”
서둘러 가방을 챙겼습니다. 어제 ‘MBTI’ 검사를 하기로 했는데 깜빡했습니다. 오후에 생각이 나서 전화로 오늘 하겠다고 신청을 한 상태입니다. 차편이 좋지 않으니 걷기로 했습니다. 걸으면 한 시간 거리이지만 차를 타면 환승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게 분명합니다. 집을 나서자 부지런히 발길을 옮깁니다. 우산을 때리는 빗방울을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습니다. 주춤하던 빗방울이 목적지 가까이 이르자 화가 난 듯 우산을 두드리며 밑으로 파고듭니다. 바짓가랑이가 흥건히 젖었습니다. 등에 멘 가방을 돌려 가슴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다행히 빗방울은 가방 속을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등이 축축함이 느껴지도록 걸었지만 겨우 시작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검사지를 받아 들고 문항을 읽고 있습니다. 강의시간이 정시에 시작되다 보니 검사지를 미리 배부하고 설명을 한 상태입니다. 하나둘 담당자에게 검사지를 넘깁니다.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서너 명은 강의를 들으며 문항을 작성해야 했습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유의사항을 읽고 문항에 표시를 하는 손놀림이 마음과 함께 바빠집니다. 은근히 걱정됩니다. 마치고 나서 제대로 검사에 응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강의 중간에 잠시 틈이 나자 검사지를 넘기고 강의가 끝나자 돌려받았습니다. 나는 어느 성향에 속할까. 내용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내향적이며, 직관적입니다. 주관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개방적이고 상황에 따른 생활양식을 선호함.’
모처럼 급박한 하루였습니다. 직장에 근무할 때 이와 같은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금요일입니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천천히 집으로 향합니다. 요즘은 그날이 그날이지만 그래도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일입니다. 월요일이 되기 전까지는 내 마음, 내발길이 오로지 내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