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유기 동물을 보면서 20231231
점점 반려동물이 늘고 있습니다. 반려식물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지만 각박해진 세상에 편하게 마음을 의지할 곳이 줄어드는 모양입니다. 너도나도 반려 개다 반려 고양이다 하며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품종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입니다. 키우다 보니 건사하기가 마음 같지 않은가 봅니다. 관리비도 많이 듭니다. 식비와 병원비가 만만치 않은가 봅니다. 떠돌이 강아지 떠돌이 고양이가 늘고 있습니다.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라나 희귀한 물고기를 물이 있는 곳에 놓아주다 보니 환경파괴가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주인을 잘 만나 사람보다 더 대접을 받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화풀이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개가 있고, 개 호텔도 있습니다. 죽어서도 사람 못지않게 장례를 치러주는 주인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위해 사는 것처럼 착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 유견차(乳犬車)가 유모차(乳母車)의 숫자를 앞섰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출생아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반려견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상업 목적이 아니라면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는 것은 경제적으로 덕을 보자는 게 아닐 것입니다. 나는 동물을 키우고 있지는 않지만 단지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중 고양이 때문에 부자가 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르네상스는 예술가가 이룬 성과물이라고 보고 있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상인들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돈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1350년경 영국의 글로체스터라는 마을에 딕 휘팅턴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그는 런던에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그는 어느 집 앞에서 잠이 들었는데 마음씨 착한 집주인이 그의 다락방을 내주었습니다. 그는 무역상 피츠워렌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휘팅턴은 심부름을 하면서 상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잠자리가 있어서 좋기는 했지만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쥐가 들끓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아둔 돈으로 고양이를 한 마리 샀습니다. 이후로 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동방으로 가는 무역선을 띠우자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조난을 당하면 크나큰 피해를 입지만 잘만 되면 큰 재산을 모을 수가 있습니다.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동양의 낯선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의 지배자는 이국의 낯선 상인에게 후한 대접을 하기로 하고 값진 음식을 만들었지만 대접을 할 사이도 없이 쥐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양해를 구하며 한숨을 내쉬는 지배자에게 물었습니다. 쥐로 인해 대접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자 쥐를 없앨 방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고양이를 기르시지요.”
배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한 마리 풀어놓았습니다. 즉시 고양이가 사냥을 개시했습니다. 이를 본 지배자는 크나큰 사례를 하고 고양이를 샀습니다. 이리하여 휘팅턴은 일확천금을 얻고 피츠위렌 딸과도 결혼을 하게 되었답니다. 아직도 영국에는 그가 남긴 재산으로 세워진 병원이 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거주지도 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입니다. 시골에는 많은 쥐들이 있었습니다. 곡식은 먹어치우는 것은 물론 집안의 물건들을 쏠고 병균을 옮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쥐를 잡기 위해 덧을 설치하기도 하고 약을 다니는 길목에 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뿐 지나면 쥐들이 들끓었습니다. 한 때는 쥐를 잡기 운동의 실천을 확인하기 위해 꼬리를 잘라오라는 정부 시책도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고양이가 귀한 시절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가을 추수가 끝나자 쥐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곡식더미로 달려듭니다. 벽기둥을 타고 오르내리며 천정을 가로지릅니다. 천정 속이 아이들의 놀이터처럼 시끄럽습니다. 고양이가 있으면 쥐가 얼씬도 하지 못한다는 말에 구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양이가 있어도 문제입니다. 이웃집의 낯선 고양이가 설날 차례 지낼 음식 중 고기와 생선을 냉큼 훔쳐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섬 생활을 할 때도 그랬습니다. 동네 어부가 숭어를 몇 마리 주어 손질을 해서 문 앞 돌 위에 걸쳐놓았는데 다음 날 보니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들 고양이의 소행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생선을 말릴 때는 빨랫줄이나 전봇대의 기둥에 매달았습니다.
요즘도 옛날처럼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지 모릅니다. 개가 닭을 물어가는지 모릅니다. 야생이면 몰라도 집에서 키우는 반려라면 주인이 싫어할 게 분명합니다. 쥐를 잡아먹는 모습을 본다면 끔찍하다고 하겠지요.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비롯한 동물을 키우는 것, 반려식물을 돌보는 것, 이 모두가 마음의 위안을 얻는 목적이라면 상대가 정을 주듯 나 또한 정을 주어야 합니다. 힘들다고 피곤하다고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내가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을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잘못된 마음이나 행동이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간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