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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1. 눈 내리는 소리 20220101

by 지금은

눈 내리는 소리 있어 꿈결에 몸을 뒤척였습니다. 쥐 죽은 듯 고요합니다. 고양이 발자국 멈춘 듯 소리는 잠시 멈췄을 뿐 다시 깊은 밤을 안았습니다.


오늘은 그믐 아니 그믐의 전날입니다. 살며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방 안이 환합니다. 아내가 곁에서 자고 있습니다. 이불을 이마까지 끌어올린 채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를 밖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아내의 숨소리였던 거야.’


생각이 드는 순간 한쪽 어깨가 하늘을 향했습니다.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숨소리는 이불속으로 숨었나 봅니다. 다시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천정에서 희미하게 내리는 눈발이 순합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살그머니 이불을 들치고 거실로 나와 창가에 붙어 섰습니다. 조용합니다.


‘언제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 거야, 환각에 사로잡혔던 거는 아니야.’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제 낮에 내린 잔설이 군데군데 얼룩처럼 남아있습니다. 얼룩을 찾아 발로 툭 차 보았습니다. 가는소금 발처럼 눈가루가 풀썩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내리려면 풍족하게 쌓일 것이지. 새해를 축복하는 눈 치고는 빈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 내리는 소리, 나는 지금 그 소리를 아직도 귓전에 매달고 있습니다. 언제였더라,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이브였지, 그리고 언제였더라, 초등학교 사 학년 때였지, 또 언제였더라, 그전에는 해마다 이었어요.


오늘처럼 눈 내리는 소리가 있었어. 달밤이었어.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거야.


“삼촌, 변소에 가야겠는데…….”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변소도 못 가. 대낮 같구먼.”


참아보다가 어쩔 수 없이 혼자 변소로 향했습니다.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당으로 내려서자, 나보다 그림자가 앞섰습니다.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그림자도 함께 움직입니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있는 동안 그림자도 내 곁에 머물렀습니다. 희미한 달빛이 화장실 안까지 따라왔다. 주위를 둘러봅니다. 귀뚜라미는 없습니다. 여치도 없습니다. 가을이면 내가 용변을 보는 동안 귀뚜라미나 여치가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뭐, 무섭지도 않네.’


그림자가 내 앞에서 뒤에서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내가 무서워하는 날이 있습니다. 별도 달도 없는 날입니다. 어쩌다 내가 화장실에 가야 할 경우 그림자는 따라나서지 않습니다. 나보다도 내 그림자는 더 밤을 무서워하는 모양입니다. 이런 날에는 작은 소리에도 머리칼이 쭈뼛합니다. 용변을 본 후에는 몸서리를 치며 재빨리 달음질을 쳐 방으로 들어와 문을 쾅 닫습니다. 무서움에 뒤를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다음날 삼촌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날에는 귀신도 무서움을 타는 거야.”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이브의 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나 많이 내리는지 금방 내 무릎까지 차올랐습니다. 초저녁 라디오를 듣다가 깜빡 졸았습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라디오 소리 대신 눈 내리는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습니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눈은 어느새 댓돌 위까지 올라섰습니다. 넉가래로 대문 앞까지 길을 만들었습니다. 대문밖에 서자 하늘 위에서 둥근달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시집을 가는 처녀처럼 망사를 얼굴에 걸쳤습니다. 희미하게 눈과 코와 입이 드러났습니다. 눈가루가 수줍은 얼굴을 옅게나마 가려주고 있습니다.


형이 말했습니다.


“뭐야, 청승맞게 새벽까지 밖에서 떨고 있었던 거야.”


“…….”


“걱정이라도…….”


“…….”


밤낮 사흘이나 쉼 없이 눈이 내렸습니다. 먹이가 부족해지자 노루와 토끼가 민가에까지 찾아왔습니다. 온 세상이 눈에 묻히자, 사람들의 왕래가 끊겼습니다. 눈 내리는 소리를 헤치고 눈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편지요.’


삼촌이 병역을 마치고 곧 돌아온답니다. 눈 내리는 소리를 안고 찾아왔던 사람은 눈 내리는 소리를 남겨둔 채 집안 식구들의 만류에도 다시 되돌아섰습니다. 우체국 집배원입니다. 중요한 소식을 전할 곳이 또 있답니다. 전보라고 했습니다.


왜 새해 첫날에 눈 내리는 소리가 귓전으로 찾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징조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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