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어느 날
18. 호칭이 문제로구나.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남에게 좀 더 나은 대우(待遇)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는 해도 나에 대해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을 때나 높은 호칭으로 불릴 경우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왠지 민망한 생각이 듭니다.
“회장님, 사장님, 관장님, 작가님…….”
이렇게 불릴 때 나는 내가 나와는 다른 사람인가 의문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어제 친구가 대뜸 생각하지 않은 말을 꺼냈습니다.
“당신은 남들이 어떻게 불러주기를 원하는 거야.”
뜬금없는 말을 꺼낸 그의 별칭은 ‘석산’입니다. 친구는 ‘석산’이라는 이름을 좋아합니다. 그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을 비롯해 어떤 분위기에서도 잘 어울립니다. 그와 나는 내 고향 돌 많은 산촌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해 ‘개천골’이라는 고향 마을을 자주 찾아가는 그는 한 달 전 동해안으로 여행을 다녀온다고 훌쩍 떠났습니다.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고 기분에 들떠있었는데 오늘 표정은 그게 아닙니다.
그가 일행과 여행지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눈이 내렸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 풍경은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하기도 하고, 동화 속을 여행하는 느낌입니다. 「눈의 여왕」, 「눈사람 아저씨」 등 겨울과 관련된 동화들을 떠올리며 여행하는 동안 동심을 마음껏 키웠습니다. 그는 어릴 적 고향 마을로 걸어갔습니다. 눈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환영했습니다. 자기 손자만 한 아이들이 눈덩이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그는 곧 그들과 어울려 같은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눈덩이가 하늘을 오갔습니다. 아이들과 눈 위를 뒹굴며 눈 사진을 찍었습니다. 발자국을 모아 예쁜 꽃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얀 산, 하얀 마을,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 그동안 번잡하던 마음이 소나기에 씻긴 듯 사라졌습니다.
다음날도 눈이 내렸습니다. 하지만 기온이 오르자 쌓인 눈이 녹기 시작했고 우산을 가리던 눈은 어느새 물방울로 변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행의 뒤를 따라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실수로 우산에 맺힌 물방울 몇 개가 앞 좌석에 앉은 사람의 바지로 튀었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어르신.”
“회장님을 보고 어르신이 뭐예요. 댁의 나이가 더 들어 뵈는구먼.”
회장의 아내인 듯 보이는 여자가 흰머리를 귀 뒤로 쓸어 올리고 스카프를 다시 여미며 말했습니다.
“그래요? 미안합니다.”
한동안 그녀의 구시렁대는 소리가 더 들렸습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이 이어지자 잠시 옥신각신했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살다 보니 별소리를 다 듣게 되었답니다. 자기 남편이 외국계 기업의 회장이어서 자신도 누구에게나 사모님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예의도 없이 ‘어르신, 할머니’가 무슨 말이냐고 계속해서 역정을 냈습니다. 그의 남편은 회사의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그녀와 여행 중입니다. 다시 말하면 퇴직 기념 여행인 셈입니다. 낯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를 알겠습니까. 그가 회장이었는지 당사자가 사모님이었는지, 더구나 지금은 회장도, 사모님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호칭이 문제구나.’
우리는 나이를 먹고도 가끔 이런 일로 얼굴을 붉히거나 싫은 말을 하기도 합니다.
‘배추밭의 주인은 누구인가?’ 전에 한동안 생각했던 문제에 얼마 전에 결론을 얻었습니다. 아니 주인은 없습니다. 있다면 모두가 주인입니다. 배추밭의 주인은 배추, 땅, 땅임자, 각종 벌레,……….
다시 생각해 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불려야 할까. 미완의 결론을 내려 봅니다. 현재 나의 위치에 맞는 호칭이면 좋겠습니다. 직분을 내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회장님이고 사모님이어야 합니까. 죽을 때까지도 최대 상승분이었던 직함을 유지해야 합니까. 더구나 낯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생각보다 높은 존칭을 요구할 이유는 없습니다. 현 상황에 맞는 존칭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때로는 ‘호’나 ‘애칭’도 좋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면 ‘누구누구님’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 모두의 사람에게 맞는 호칭을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그 한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늙어갑니다. 언제인가는 겪어야 할 일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호칭이면 어떤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마음이면 족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과거가 현재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 과거의 신분이 현재 상황보다 못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내 행동이나 상황에 따라 호칭하면 되겠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은’ 아니면 ‘지금은 님’이라고 부르면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