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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19. 봄의 시작 20220216

by 지금은

산이 노랗게 물드는가 싶더니만 정오가 되자 해맑은 미소로 나무들을 품었다. 밖에서 막 돌아온 아내가 귀를 잡으며 말했다.


“입춘이 지났는데도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춥네.”


농담이라는 생각에 대답 대신 창문을 열었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어젯밤에는 날씨가 에는 갑자기 추워져서 동네가 조용했던 거야? 밖을 오랫동안 내다보고 있었는데도 새들의 날갯짓이 없었다. 새들도 추우면 활동하기 쉽지는 않겠지. 날갯짓을 하면 몸이 더 차질 테니까 말이야. 내일도 춥다고 했는데 일기예보가 틀렸으면 좋겠다. 예보관이 들으면 눈살을 찌푸릴 생각을 했다.


일주일 전이다. 무심코 바라본 아파트 앞 매화나무의 어린 눈이 속살을 드러내려고 눈치를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매화나무 앞에 서서 손뼉을 서너 번 쳤다.


‘눈 떠, 눈을 떠.’


한발 물러나 있던 햇살이 슬그머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옆에 있는 앵두나무, 벚나무가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꽃망울을 내보인다. 제법 팥알만큼 부풀었다. 몸집이 큰 목련이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도토리 키 재기는 그만두고 나를 올려보라는 표정이다. 포근한 솜털을 두른 꽃망울이 햇살에 몸을 내맡겼다. 연하디 연한 연둣빛이 햇살을 머금었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마스크로 가려진 코 밖으로 드러난 귀가 시리다. 아파트 사이를 뚫고 바람이 달려왔다. 도토리나무의 마른 잎들이 화들짝 놀랐다. 떨림과 함께 소리가 요란다. 일순간이다. 물수리가 물고기를 채가듯 아직도 쓸려가지 않은 낙엽을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작은 나뭇잎은 파도에 춤추는 조각배처럼 나뭇가지 사이를 너울거리며 빠져나갔다. 손이 저절로 머리를 향했다. 아차, 하는 찰나 바람이 내 모자를 빼앗아갔다. 바람이 심한 날이면 나는 가끔 모자를 날린다. 잘못 찬 공이 데굴데굴 엉뚱한 곳으로 달아나듯 모자가 엎어졌다 젖혀졌다 반복하며 바람을 따라간다. 덩달아 내 발걸음이 빨라졌다. 내 마음도 빨라졌다. 다행히 모자를 저만치 멈춰놓고 달아나버렸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의 일이다. 봄날치고는 매운 날이었다.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논에 쌓여있는 짚단 몇 개를 풀어 불을 놓았다. 성냥을 가져오기를 잘했다고 말하며 이웃 동네 친구와 기분 좋게 불을 쪼였다. 어제 동네 형들과 쥐불놀이를 한 자랑을 했다. 친구는 지지 않으려고 더 많은 논두렁을 태웠다고 말했다. 동화에 나오는 동물들의 나이 자랑만큼이나 불놀이 장면과 시간을 부풀렸다. 내가 목에 힘을 주어 말할 때다. 친구가 갑자기 나를 외면하고 논둑을 넘어 달아났다.


“뭐야, 같이 가야지.”


어느새 나타났는지 육 학년 형들이 불을 끄고 나를 둘러쌌다.


“가자, 선생님이 너희 둘 붙잡아오라고 하셨어.”


학교 울타리 위로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분이시다. 끌려갔다가는 분명 매를 맞게 생겼다. 형들이 나를 잡아끌자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형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팔려가는 송아지처럼 끌려갔다.


선생님 앞에 고개를 떨군 채 발끝만 쳐다보았다.


“몇 학년.”


“일 학년입니다.”


나 대신 형들이 말했다.


“교장선생님이 운동장 조회시간에 불장난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선생님이 들고 있던 지휘봉을 교실의 나무벽에 두드렸다. ‘탕탕’ 소리에 마음이 점점 움츠러 들었다. 몸이 떨렸다.


“한 번 더 불장난을 하면 종아리 맞는 거야.”


선생님이 나를 돌려세웠다. 나는 물총새처럼 학교 뒷문을 빠져나와 집을 향해 달렸다. 동구밖 징검다리를 건넜다. ‘휴’하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마의 땀을 닦았다. 등이 축축하다.


다행이다. 모자를 연못에 빠뜨리지는 않았다. 바람도 심한 장난은 싫은가 보다. 부들의 마른 줄기들 사이에 걸친 모자를 집어 들었다. 연못을 향해 묻은 티끌을 털었다. 온기가 사라졌다. 머리에 쓰는 순간 이마가 서늘하다. 올봄은 꽃샘추위가 없었으면 좋겠다.


앞에 있는 버들가지에 손이 갔다. 버들강아지가 솜털을 한껏 키우고 있다. 물이 충분히 오르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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