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웅얼웅얼 20220222
오늘 같이 바람이 부는 날이면 햇볕이 좋습니다. 바깥나들이를 할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뿐이겠는가. 늦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혹한이 몰아닥칠 때면 종종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담벼락입니다. 불한당처럼 사방으로 휘저으며 날뛰던 북풍도 이곳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양지쪽 담벼락에는 따스한 기운이 서려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아침을 먹은 후 밝은 햇살이 마을을 감싸 안을 때면 하나둘 양지바른 집, 담벼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잠시 후 벽이 따스해지면 움츠렸던 몸을 펴기 시작합니다. 이어 호주머니에서 딱지가 나오고, 구슬이 나오고, 제기도 나옵니다. 이미 손에 팽이와 팽이채를 쥐고 있는 친구도 있습니다. 그날그날 모이는 아이들의 숫자에 따라 놀이가 정해집니다.
개들도 따뜻한 곳을 압니다. 몇몇이 주인을 따라왔습니다. 눈치를 살피다가 아이들이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냉큼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이들의 자리입니다. 식곤증을 빨리 느꼈을까. 잠이 몰려오나 봅니다. 어느새 스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가장 편안한 자세입니다. 가끔은 우리들의 졸음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겨울이라고는 해도 지금처럼 두꺼운 점퍼나 코트를 입을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스웨터나 목도리가 추위를 막아줍니다. 나는 겨울이면 스웨터를 입었습니다. 고모는 뜨개질을 잘하기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미군 방한용 양말을 풀어서 짠 것입니다. 목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정물감을 들인 스웨터와 목도리는 내 겨울나기로는 최고입니다. 바람이 막힌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면 곧 몸이 따스해지기 시작합니다. 산토끼 털 귀마개도 있습니다. 가죽이 뻣뻣하기는 해도 귀를 감싸니 보온의 효과가 큽니다. 오후가 되면 친구들과 개울이나 논으로 얼음을 지치러 갑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한 한 방법으로 음지를 피해 햇살을 찾아다닌 셈입니다. 바람이 자는 곳, 모닥불이 있는 곳도 추가해야겠습니다.
땅이 풀리는 시기가 되면 칡뿌리를 캐러 산으로 갑니다. 가끔 다람쥐 굴을 발견하고는 마음을 돌려 굴을 팝니다. 재수가 좋으면 다람쥐 새끼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 먹지 못한 다람쥐의 먹이를 꺼낼 수도 있습니다. 도토리, 밤. 호도입니다. 이맘때쯤이면 도토리와 밤의 노란 싹이 좁쌀알만큼, 녹두알만큼 내밀었습니다. 그 어두운 곳에서도 어떻게 봄의 냄새를 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추운 시기이지만 땅 위나 땅속에서도 모든 생물들은 봄을 꿈꾸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어느새 연못가 수양버들의 긴 가지에는 연둣빛 물이 오르고 있습니다. 여름부터 내년을 준비한 목련의 눈망울은 엄지손가락만큼 부풀었고, 매화의 꽃망울은 이에 놀란 듯 속살을 보일기세입니다.
코로나가 덮치면서 혹한이 시작됐습니다. 일반인보다 유난히 더욱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조조정 대상이 된 노동자들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을 빌미로 한 구조조정입니다.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는 경비원들을 모두 해고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추운 곳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경기도 고양시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주민들이 투표를 해서 경비원 인원 구조조정에 반대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렵지만 함께 이겨나가자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추울수록 양지가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음지로 내몰지 말아야 합니다. 비좁기는 해도 다 같이 담벼락 밑 양지에서 따스함을 나누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선택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누리는 경제적 효과는 더디지만 언젠가는 찾아오게 됩니다. 봄은 멀지만 언젠가는 새싹이 돋고 꽃이 피게 마련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춥다고 합니다. 하지만 햇볕은 언제나 풍성하게 내리쬐고, 담벼락 밑의 양지는 충분히 넓습니다. 그곳에서 이 추위를 거뜬히 넘길 수 있습니다. 춥다고 끙끙 앓을 게 아니라, 다만 우리들의 마음만 추워진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