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늘 낯선 곳 202203010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처형으로부터 부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동서가 새벽에 운명했다는 기별입니다. 말을 듣는 순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또 한 사람이 나로부터 멀어졌구나. 부고를 받는 순간마다 비슷한 느낌입니다.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후두가 좋지 않아 음식물을 삼키는데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나는 이별의 허전한 만큼이나 부고를 받으면 항상 고민에 빠집니다. 상황에 따른 인사말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소식을 듣자 늘 하던 대로 소책자를 펼쳤습니다. 문상에 대한 글귀가 있는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고인과 상주에 대한 예의범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천히 읽어봅니다. 늘 같은 페이지에 같은 문구입니다. 여러 번 보다 보니 이제는 외울 정도로 내용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뿐 상가에서는 늘 마음이 불편하고 낯섭니다. 여러 차례 인사말을 중얼거렸건만 막상 상주 앞에 서니 그 말을 밖으로 표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에 쓰지 않던 말이라 쑥스럽고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오늘은 꼭 써먹어야지 했는데 결국 침묵을 하고 말았습니다.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나는 이 나이를 먹도록 무엇을 했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늘 철부지 같은 마음입니다. 위로의 말은 끝내 전하지 못하고 스스로 어색한 표정을 짓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경우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조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는 사람의 죽음을 매일 보는 것이 아니고 일 년에 한두 번이고 많으면 서너 번입니다. 상대의 죽음을 대하는 경우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합니다. 향을 피우고 고인에게 절을 하고 상주들과 맞절을 하고 그렇게 보편적인 절차를 따르지만 정작 인사말을 꺼내기가 어렵습니다. 침묵으로 예의를 지키는 것도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상주에게 위로의 말을 잘 전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에 나는 문상을 가야 할 경우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여러 사람 틈에 끼다 보면 말을 하지 못해도 분위기에 휩쓸려 인사치레가 이루어집니다.
무영이라는 초등학교 동창, 고향 친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변의 분위기를 밝게 하는 매력의 소유자다. 좋은 일이 있는 장소나 우울한 일이 있는 장소나 무영이가 나타나면 그에 걸맞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셔요…….”
이어 상주의 인사에 따라 적절히 위로의 말을 합니다. 슬픈 가운데서도 가끔 상주의 엷은 미소를 끌어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분위기를 흐리는 말이나 행동은 아닙니다.
“헤어지니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고인은 분명 천당을 맡아놓은 당상 이유. 평소에 복 받을 일을 많이 했으니 하는 말이유. 마음이 하늘만큼 넓지 않았남유.”
상주의 흐린 얼굴이 펴졌습니다.
“법 없이도 사실 분이었으니 자식들이 모두 성공한 거 아니 것슈.”
나는 다시 생각해도 말수가 적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던 매한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소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남의 말을 주로 경청합니다. 그러고 보니 상대의 말을 가로채거나 끼어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상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이런 성격 탓에 중요한 자리에서 말실수를 한 일은 없지만 분위기는 그리 밝지 못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장단을 맞출 줄도 알아야 하는 데 늘 마음뿐입니다. 지나고 나면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천성이 그러하니 어찌하겠습니까. 고쳐봐야겠다고 한동안 고심을 했지만, 고민으로 일관합니다.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
뭐 이런 격언이 있기는 해도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친구가 최근의 신문 기사를 예로 들어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많은 돈을 갈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도 안다고 말했더니 주변에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나열했습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언뜻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꼭 속담은 아니어도 세계의 역사 속에는 말 한마디가 중요한 역할을 한 예들이 많습니다. 그중 서희 장군을 들 수 있습니다. 서희는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협상가라 할만합니다. 그는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책상 앞에 앉아 대담한 논리로 물리친 지장입니다.
나는 위대한 말 재주꾼이나 협상가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느 곳에서나 분위기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언어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있기에 전에 도서관에 가서 언어의 기술에 관한 책과 분위기에 잘 적응할 요령을 기술한 책 몇 권을 빌려본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안다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세상일이란 안다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단히 생각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볼 때 많이 안다고 남을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아는 것이 많으면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됨은 분명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요령이나 기술도 필요합니다. 나는 성격상 말이 적은 것은 틀림없지만 적은 만큼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는 의지가 있어야겠습니다. 노력해 볼 일입니다. 가끔은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부러워하지 말라, 말 잘하는 사람 중에는 사기꾼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