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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Oct 31. 2024

2022 어느 날

38. 말 잔치 20220420

“밥 한번 먹어야지.”


어느새 3년이나 되었지만 밥 한 끼 같이 먹지 못했습니다. 밥은 무슨 밥, 자리에 마주한 적도 없습니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밥에 대해 말한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두 말의 사이가 며칠 아니면 한 달 이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평소에도 말수가 적지만 더더욱 빈말은 잘하지 않는 편입니다. 밥 한번 먹자고 말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친구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헤어졌습니다. 그 역시도 바람 잡는 말은 하지 않는 성격인데 그 이후로 함흥차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핑계를 대는 일이 우습기는 하지만 코로나 전염병의 등장으로 생긴 일입니다.


코로나 전염병은 일상에서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사람들을 내몰았습니다. 처음부터 만남 자체를 두렵게 했습니다.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니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연히 마주쳐도,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있어도 만나자거나 식사를 제안하는 일을 선뜻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전염병은 어느 날 갑자기 해안을 덮친 무시무시한 해일처럼 지구촌을 홍역의 도가니에 몰아넣었습니다. 한동안 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흑사병의 책을 읽고 연상되는 상황만큼이나 고통스럽습니다. 젊은 남녀들의 결혼식이 미루어지고, 식을 치른다 해도 참석 인원이 제한되었습니다. 장례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공적, 사적인 모임에 적정 인원수가 정해지고 자영업자의 영업시간도 제약받았습니다. 지구촌은 거리상 멀든 가깝든 인적 물적 교류의 제약으로 많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서로 간의 오해와 시빗거리가 생기고 경제의 위축으로 큰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코로나 전염병은 몇 가지 색다른 풍경의 풍경을 가져왔습니다. 평소의 건강과는 관계없이 우선 마스크를 쓰는 일입니다. 지구촌 대부분의 사람이 의무적으로 입과 코를 가려야만 합니다. 예방주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공공기관을 비롯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방역소독을 해야 하는 새로운 규칙이 생겨났습니다. 건물이나 공공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체온을 재고 예방주사를 맞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만남 자체를 껄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던 시기에는 산책하려고 공원에라도 들어서면 꼭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정해진 길을 이탈하여 잔디밭을 가로지르거나 나무 사이를 지났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니 낯선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곧 병균이 내 몸을 파고들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두 달 전에 이종 동생 아들이 결혼했습니다. 초대받았지만 은행을 통해 축의금만 보내고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보다는 참석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결혼식이 끝났을 무렵 전화가 왔습니다.


“올 줄 알았는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몸살이 났나 봐. 몸이 으스스하고 콧물이 나서…….”


공교롭게도 우리 형제들이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며 목소리에 서운한 기색이 보였습니다. 이종 간이지만 지금까지 한 형제처럼 우애 있게 지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본 일이지만 형과 여동생은 SNS 사용 방법을 모르지 않나 추측합니다. 알고서도 참석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며칠 전 문자를 보냈는데도 답이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아직 종이 청첩장에 익숙합니다. 확인해 본다고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나 코로나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다행히 열이 내리고 콧물이 멈췄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참석해야 했는데, 버스가 지나간 다음에 손을 드는 격이 되었지만, 뉴스 시간마다 아나운서는 수만, 수십만 명의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의료종사자와 격리된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일상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한 달 전에는 손위의 동서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문을 가고 오는 동안에도 병에 걸릴까 하는 마음에 조심스러웠습니다. 장례식장은 예전과는 달리 조문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방문객들은 인사를 하고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주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장례 기간도 늘었습니다. 화장장이 만원이라서 일정보다 하루 내지 이틀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 후유증은 컸습니다. 고인의 아들 부부가 코로나에 걸리는가 싶었는데 손녀와 처형도 며칠 사이를 두고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괜찮은 거예요?”


처형이 전화했습니다.


그 무렵 처남의 딸, 사위, 외손자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그 집안사람들은 조문을 가지 못하고 전화로 인사를 대신해야만 했습니다.


정부에서 며칠 전부터 연이어 나에게 안전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빠른 시기에 예방접종을 받으라는 권고입니다. 예방주사를 세 차례나 맞았는데 또 맞으랍니다. 고령자는 한 번 더 맞는 것이 면역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예방주사 곧 맞아야 하지 않겠어요.”


나는 다른 예방접종과는 달리 코로나의 경우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아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약을 먹어도 며칠 동안이나 심한 통증이 지속되었습니다. 맞아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걱정이 됩니다. 오월이 있으니 좀 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요양원에 계신 삼촌과 헤어지며 드리는 말씀입니다. 코로나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해마다 여러 번 찾아뵙고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함께했습니다. 찾아뵙지 못한 지 오래됐습니다. 삼촌의 연세가 어느덧 100세,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면회를 할 수 없으니 가끔 안부 전화를 하는 외에는 별수가 없습니다. 빨리 코로나 전염병이 사라지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밥 한번 먹어야지.”


밥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국수도 괜찮고, 아무거라도 좋을 듯싶습니다. 얼굴 마주하고 말 잔치라도 크게 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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