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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Oct 31. 2024

2022 어느 날

39, 소리를 부르는 봄 20220422

‘칼을 지니고 왔어야 했는데, 그것도 예리한 칼로,’


오랜만에 책과 내가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필자의 어릴 적 주위 환경이 나와 동감을 이룬 때문입니다. 피리, 식영, 찔레순, 야생화……. 며칠 동안이나 꼼짝하지 않고 집에만 머물러 있었더니 좀이 쑤십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눈을 떼자, 자리에서 일어나 천정을 향해 팔을 힘껏 뻗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습니다. 목을 몇 차례 회전하고 허리도 좌우로 돌렸습니다.


내가 칼 생각을 한 것은 집 앞의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차도를 건너 수변공원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둑에는 털을 뒤집어쓰고 있던 버드나무가 버들가지를 떨어뜨리고 태양 아래 연둣빛 잎을 드러낸 채 목욕 중입니다. 둑길을 따라 늘어선 벚나무들의 화려함을 멀리하고 동떨어져 있습니다. 낭떠러지 가까이 다가가 석축에 의지해 버들가지의 끝을 겨우 잡았습니다. 조심스레 힘을 주어 앞으로 끌자 가지가 휘어지며 줄기가 다가왔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쪽 손이 내 주머니로 갔습니다.


‘텅 빈 주머니에 왜 손을 넣은 거야.’


주머니에 칼이 있을 리 없습니다. 집에서라면 연필을 깎기 위해 필요하지만, 평소에 밖에서 쓸 일은 없습니다. 나물이라도 뜯을 경우라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번화한 도시에서는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내보였다가는 오해받기 쉽습니다.


버드나무를 보는 순간 피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쯤은 가지에 물이 잘 올랐을 것입니다. 껍질을 비틀어 보지 않아도 껍질을 벗겨보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이맘때쯤인 늘 동네방네가 아이들 피리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그중에 나도 있었습니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옛 추억이 생각나 한두 번 버들피리를 불곤 했습니다. 어느 날 피리를 불고 있을 때 옆을 지나가던 여인이 말했습니다.


“피리 소리가 너무 청승맞아요.”


아직은 내 피리 부는 솜씨가 녹슬지는 않았나 봅니다. 시끄럽게 들리지 않다니 다행입니다. 감정이 남아있음이 분명합니다. 내 유년기의 피리 소리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소리를 내는 것에 만족하다 보니 생각 없었습니다. 한적한 시골이라고는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삑삑 대고 불어대니 어른들은 신경이 쓰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언젠가 밤에 잠이 깬 나는 낮에 불다가 놓아둔 피리를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곤히 잠들어 있던 식구들의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아침에 잠이 깨자, 할머니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한밤중에 아래 윗집 사람들이 깨어 잠을 설쳤다고 하셨습니다. 집 안에서 피리 부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집안에서 피리를 불면 뱀이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내가 피리를 불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해입니다. 큰 구렁이가 우리 집 담장에 나타났습니다. 며칠 동안 돌담을 어슬렁거리더니 이웃집 울타리를 넘어 사라졌습니다. 삼촌이 뱀을 잡으려고 하자 할머니가 말리셨습니다. 구렁이는 영물이니 잡으면 우환이 생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뱀이 싫습니다. 언제 보아도 징그럽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후로는 집안에서 피리를 불지 않았습니다. 밖에서도 사람들이 보이면 불기를 멈췄습니다. 대신 동구 밖으로 나가면 내 세상처럼 마음껏 불었습니다. 학교에 가는 길에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피리는 한 철 내 손에 들려있었습니다.


수변공원을 벗어나는 곳에 홀씨를 매단 민들레 줄기가 보입니다. 줄기의 밑 부분을 잘랐습니다. 입 가까이에 홀씨를 대고 ‘훅’하고 불었습니다. 홀씨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릅니다. 입속으로 잘 가란 인사를 했습니다. 줄기를 검지 길이만큼 잘랐습니다.


‘왜’


피리, 민들레 피리.


민들레 피리는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합니다. 끝부분이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럽게 잘라 입에 물어야 합니다. 나는 이 피리를 불기 위해 어렸을 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이번에도 실패입니다.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아서 입에서 떼어보니 어느새 갈라져 있습니다. 남은 줄기를 다시 잘랐습니다.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버들피리나 보리피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기교를 부리기는커녕 소리 내기에도 버겁습니다. 몇 걸음 걸으면 불다가 고개를 돌려 ‘퉤’ 하고 뱉어버렸습니다. 입안이 씁쓸합니다.


나는 봄이면 아직도 착각 속에 삽니다.

‘내 피리 소리는 아직도 최고지.’


누구보다도 기교를 잘 부린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다양하게 소리의 변화를 유도합니다. 입으로 불며 피리의 끝부분을 두 손으로 감싸 높낮이와 강약을 조절하며 감정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내 피리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소리 자체가 슬프다거나 시끄럽다며 얼굴을 찡그립니다. 고개를 저으며 외면하기도 합니다.


나는 제멋에 겨워 삽니다.


‘겨울에 피리 부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온 동네가 눈에 묻힌 날입니다. 사랑방 아궁이에 군불을 때다가 마른 밀짚 몇 가닥을 발견했습니다. 줄기를 잘랐습니다. 이빨로 취구에 침을 묻히며 자근자근 눌렀습니다. ‘뽀오오’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아궁이를 향했습니다. 가마솥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담백한 소리가 하얀 김처럼 퍼집니다.


오늘은 벚꽃이 초겨울에 손짓하는 함박눈처럼 너울거립니다. 내일은 모레는 아니 글피는 한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벚꽃이 춤을 출 것입니다. 나는 이 꽃눈 날리는 길을 좋아합니다. 장난감 병정처럼 꽃길을 걸어야 합니다. ‘뽀오오’ 버들피리 불면서, 아니 ‘오오야오오야아’ 보리피리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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