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산책 20220513
산책자(散策者)
한가하게 이리저리 산책하는 사람.
내가 낱말의 뜻을 잘 몰랐을 때는 산책자가 대단히 위대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산책자」라는 글을 읽었으면서도 말입니다. 내용 파악에만 몰두해서 일어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순한 낱말이지만 사전을 찾아 해결했습니다.
나는 산책하기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몸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마음의 건강에 더 좋다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산책하다 보면 종종 나 자신을 떠나 자연에 안기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여행하게 됩니다. 나와 동행은 대부분 내 그림자뿐입니다. 아내와 아들은 나와 함께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걷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습관에 적응하기가 어려워해서입니다. 내가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종아리가 뻐근함을 느낍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몸이 무거워진다는 느낌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에 안착했을 때는 피로감보다는 마음이 가벼운 마음에 오늘 하루가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대야에 따스한 물을 받아 발을 담급니다. 욕실의 문지방을 몸의 가운데에 두고 팔베개와 함께 마룻바닥에 누웠습니다. 눈을 감자 흰 천장이 사라지고 맑고 투명한 하늘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나를 품어주었던 공간입니다. 아직도 마음을 떠나지 못한 산책의 미련이 그림을 더 그려야 하나 봅니다.
나는 가끔 앞을 보며 정신없이 걷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경우입니다. 이런 때를 제외하고는 천천히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걷습니다. 땅바닥을 보기도 하고 전후좌우를 살피며 위로 눈을 치켜뜨기도 합니다. 나무의 기둥이나 가지, 잎, 꽃을 관찰합니다. 하늘을 보는 것은 물론입니다. 하늘보다 낮은 구름에 눈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가을날 어느 하루를 몽땅 구름과 눈 맞춤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구름이 뭐 그게 그거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모습은 변화무쌍합니다.
소나무를 눈여겨본 일이 있습니까. 변함없이 절개와 기상을 드높이는 나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은 관찰력을 좀 더 키웠으면 합니다. 일 년 동안 꾸준히 살펴본 일이 있습니까. 눈이 녹으면서 새순이 돋았나 했는데 수술은 노란 햇살에 타조의 목처럼 두서너 뼘 이상 자랐습니다. 바람이 송화를 흩어놓았습니다. 노란 가루가 방앗간의 고운 쌀겨처럼 사방으로 퍼집니다. 여름이 되자 앙증맞은 연두색의 솔방울이 보입니다. 바늘잎은 녹색으로 짙어졌습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갑니다. 지난해의 솔방울이 입을 열었습니다. 날개를 단 씨앗들이 솔방울의 둥지를 떠나 여행합니다. 몇몇은 주위 어디엔가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홀로서기를 할 것입니다. 그 많은 씨앗 중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해묵은 솔방울들이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겨울로 접어듭니다. 나무의 외피는 두꺼움을 더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눈여겨본다면 조금은 이상한 사람으로 볼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자연을 관찰하는 일은 책을 읽는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자연과 책의 동화, 자연과 미술의 어울림, 음악과 역사와도 연결이 됩니다. 내 글 속에는 내가 익힌 지식 못지않게 자연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 오는 날, 구름이 드리운 날, 맑은 날, 눈이 오는 날, 꽃이 피는 날……. 그 풍경의 묘사와 생각이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이끕니다.
내 경우 산책을 한다는 것, 꼭 한적하고 아늑한 장소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도 좋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일주일에 한 번쯤은 시내 중심가를 배회합니다. 시장 골목,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 토요일이나 일요일 서울의 고궁 나들이…… 이곳 사람들의 각자의 행동 모습, 외모, 말씨 등을 관찰합니다. 그 많은 사람에게서 하나하나 각자의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팔자걸음을 걷는 사람, 어깨가 좌우로 흔들리는 사람, 근심거리가 많은 양 고개를 푹 숙인 사람, 세상에 제가 제일인 양 고개와 허리가 꼿꼿한 사람…….
나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신발을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양편으로 갈라 앉아 바닥에 발을 감춘 신발들, 조금 먼 쪽을 보고 있노라면 가지런한 신발들이 진열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각양각색의 신발과 양말목, 그 주인의 마음은 어떨까 상상을 해봅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스케치북을 펼쳤습니다. 각각의 신발과 주인의 마음을 그려보려 했습니다. 머릿속의 그려진 그림과 종이에 표현된 그림은 차이가 크지만, 이미지만큼은 동일시됩니다. 내 그림 실력이 상상되는 표현을 아직은 따라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한 일은 아닙니다. 개발새발 그림이 우습다고 여길지는 모르나 발전했다는 마음에 위안으로 삼습니다. 잘되고 못되고는 다음 일이고 표현했다는 자체에 방점을 찍습니다.
산책, 나는 그 뜻 자체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