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인사 20220523
“그렇게까지 머리를 숙일 게 뭐람.”
아내가 팔을 밀치며 말했습니다.
김포공항역에서 갈 곳의 위치를 찾지 못해 주위를 기웃거릴 때입니다.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바꿔 타야 할 노선을 말했지만 무심하게 지나칩니다. 종종걸음입니다. 몇 차례 허탕을 쳤습니다. 출근 시간이라서 바쁜지 귀찮아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야 할 곳을 잠시 미루고 한 구석으로 물러났습니다. 나는 지금 외국 어디엔가 있다는 착각이 듭니다. 침착한 마음으로 천천히 주위를 살펴야 합니다. 노선에 대해 아는 사람에게 물을 생각입니다. 경비원, 청원경찰, 청소원, 봉사자들의 모습을 찾습니다. 급할수록 서두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을 일찍 나오기는 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정해진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찾는 노선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역 안의 이정표를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입니다. 한 무리의 빨간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역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실례합니다. 김포 골드라인 전철을 어디서 타야 할까요?”
맨 끝에 가던 사람이 돌아섰습니다.
“따라오세요. 지하 이층입니다.”
그녀는 지하 삼 층에서 헤매던 나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버튼을 누르기까지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선생님께 인사를 했던 것처럼 구십도 인사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멋쩍은 듯 나만큼이나 머리를 숙였습니다. 모퉁이를 도는 모습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인사 잘해서 나쁜 거라도 있나.”
“그렇지는 않지만, 좀 과분한 듯해서.”
친절에 대한 인사에 대해서 뭐 과분할 게 있을까. 나는 종종 허리를 깊이 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 중에는 가끔 농담 삼아 말합니다.
“꼭 유치원 아이들이 하는 배꼽 인사 같아.”
유치원 아이들의 배꼽 인사면 뭐 어떤가. 상대가 친절함을 보이면 최대한의 예의를 표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노인회관에서 포켓볼을 배울 때입니다. 잠시 차를 마시며 잡담하는 중에 한 분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높으신 분의 비서를 하셨어요, 아니면 경호원을 하셨나요?”
“아닙니다.”
“오라 서비스직에 계셨나 보구먼.”
아니 나는 아이들을 가르쳤고 다음은 도서관에 근무했습니다.
인사란 마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바른 사람은 인사 또한 바릅니다. 그렇다고 나를 자랑하려는 마음은 전혀 아닙니다.
행동만큼이나 말도 중요합니다. ‘상길이와 박 서방’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여겼는데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같은 말씀을 해주셔서 전해오는 이야기임을 알았습니다. 그 후 이야기책에서도 읽었습니다. 내용을 잠시 인용해 봅니다. 옛날, 박 상길이라는 상놈이 푸줏간을 열었는데 그를 아는 양반 두 사람이 시장에 들렀다가 이 푸줏간으로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얘, 상길아! 고기 한 근만 다오.”
“예, 여기 있습니다.”
박 상길은 양반이 주문한 고기 한 근을 베어 내놓았습니다. 두 번째 양반도 고기를 주문하려는데 박 상길의 나이가 꽤 든 것 같은지라 말을 높였습니다.
“박 서방, 나도 고기 한 근 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박 상길은 아까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고기를 썰어 두 번째 양반 앞에 내놓았습니다. 앞서보다 두 배는 됨직해 보였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양반이 역정을 내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놈아! 같은 한 근을 주문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차이가 크게 난단 말이냐!”
“예, 그거야 앞에 고기는 상길이가 잘랐고, 뒤에 고기는 박 서방이 잘라서 그렇답니다.”
박상길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니 앞의 양반은 아무 대꾸도 못 했습니다. 상길이와 박 서방은 이렇게 다른 사람입니다. 아니, 말 한마디에 따라 상길이가 되기도 하고 박 서방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을 신분이나 나이는 물론 계급이나 생김새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입은 옷이나 인물, 재산이나 타고 온 자동차로 대우해서도 안 됩니다. 말 한마디에 상길이와 박 서방이 되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이란 의외로 단순한 면이 있습니다.
인생이 실패하는 이유, 중 그의 팔 할이 언어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말 한마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에 의하면 역사 이래 총이나 칼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혀끝에 맞아 죽은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말을 삼가고 예의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전철에서 내렸습니다. 나는 삼 번 출구, 아이와 부모는 오 번 출구로 발길을 옮깁니다.
“안녕히 가세요.”
젊은 부부가 인사를 하자 아이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배꼽 인사를 했습니다. 나팔꽃 세 송이가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나 봅니다. 전철 내 옆자리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한동안 가지고 놀던 아이가 싫증이 났는지 부모를 보챘습니다. 곧 울음이 터질듯합니다. 심심풀이 삼아 색종이로 접은 꽃을 하나씩 건넸습니다. 빨강, 노랑, 보라의 나팔꽃입니다. 수줍음을 타는 아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하나를 주고 둘을 주고 셋을 주는 동안 아이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습니다. 말문도 열었습니다.
양손에 하나씩, 머리에 하나, 기쁨을 안고 돌아갑니다. 나 또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