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기다림의 길 20220803
“같이 안 갈 거지요.”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내가 물었습니다.
“말로만 그렇다는 거지.”
나는 요즈음 많이 바쁩니다. 늘 그렇게 지내기는 하지만 나와의 약속과 함께 남에게도 보여야 하는 내 모습 때문입니다. 평소라면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지만 가끔은 게으름을 피우는 때도 있습니다. 왠지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 갑자기 하기 싫어서……. 이유는 다양합니다.
육 년 전의 일입니다. 내가 기대했던 일이 생겼습니다. 생각지 않던 자서전 그림책 만들기를 했습니다. 책을 검색하기 위해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하던 중 그림책 만들기 신청 알림이 떴습니다. 종종 낙서 아닌 낙서를 하는 나는 내용을 읽어보고 흥미가 생겨 신청했습니다. 곧 책 만들기에 돌입했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가끔 그림책을 읽어보기는 했어도 사전 지식이 없다 보니 줄거리 구성이나 그림 그리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갈등의 연속입니다. 몇 차례 포기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심정이라 것을 알고 견뎌보기로 했습니다.
더구나 더 힘들었던 점은 그림책 강사분과 도서관 담당자 모두 처음 대하는 실무이고 보니 그분들의 시행착오도 있었습니다. 전체 인원의 반수 이상이 그만두었지만 나머지 분들은 잘 견뎌냈습니다. 계획보다는 육 개월 이상이나 지연됐지만 책을 받아서 들었을 때 기분은 신춘문예 당선 때만큼이나 좋았습니다. 흔한 말로 하늘을 나는 느낌이라면 맞을 것 같습니다.
내 일이 중요하니 당신의 수상식에 같이 할 수 없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속으로는 다소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한솥밥을 먹는 처지에, 더구나 부부인데 하는 생각에 빈말이라지만 속으로는 좀 켕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상을 받으러 갈 때는 꼭 같이 가서 축하를 해주었는데…….
아들이 마침 여름휴가 동안이라서 함께 갔습니다. 보통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곤 했는데 아들의 힘을 빌리니 오가는 과정이 한결 여유롭고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상을 받는 동안 아들은 꽃다발을 전하고 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세찬 빗줄기 사이를 뚫고 다니는 하루였지만 오늘은 봄 햇살을 맞는 벚꽃 같은 시간입니다.
아내와 나는 늦깎이 인생인가 봅니다. 학창 시절에는 상을 받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또 남에게 자랑할 만한 무엇도 없었습니다. 다만 학교를 빠지지 않고 정해진 규칙 속에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학업성적이 뛰어나지 않았어도 행동거지가 반듯한 학생으로 인식되었을 뿐입니다.
나는 궁금증이 많은 사람입니다. 내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나서의 일입니다. 집에서 하릴없이 머문다는 것은 성격상 맞지 않습니다. 돈을 버는 일은 끝났으니 대신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저것 관심을 가져보았지만, 독서와 글을 쓰는 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후에도 배우는 일을 즐겼습니다. 나 모르는 사이에 꽃꽂이, 뜨개질, 에어로빅, 수예, 공예 등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언제인가부터 서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꾸준함은 결실로 이어지게 마련인가 봅니다. 나의 독서와 글쓰기처럼 아내의 서예의 배움도 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남 앞에 내세우는 성격은 되지 못합니다. 남들의 이야기에 침묵으로 일관하다 분위기에 휩쓸려 마지못해 한두 마디 할 뿐입니다. 보통 사람이 되기 위해 습득하기 시작한 지식이 어쩌다 보니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력에 추가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작가라는 말이 흔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상을 받고 서예협회와 미술협회에서도 작가 중도 받았으니 말입니다. 어느 날 아내는 초기 동료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앞서갈 때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소질이 없나 봐.”
"왜?"
“다른 사람들은 상을 몇 차례나 받았는데 나는 이제야…….”
“먼 길을 가려면 황소걸음이 나을 텐데.”
앞의 사람들은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내는 내 말처럼 꾸준했습니다. 붓을 잡은 지 햇수로는 어느덧 삼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전시회에 온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글씨가 무르익었네요.”
‘대기만성(大器晩成)’
집에 돌아와 한 번 더 축하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꾸준함이 결과를 이루어 냈다는 말로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기를 당부했습니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파생 효과도 있게 마련입니다. 배움을 바탕으로 비슷한 영역을 탐구하는 일은 다소 수월할 수 있습니다. 시행착오를 줄이고 이미 배운 지식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요즈음 캘리그래피와 연필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 동화에서 시작된 글쓰기가 산문과 그림책 만들기, 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책 내셨어요, 작품이 많을 텐데……”
“아직은…….”
함께 글쓰기를 배우는 사람들에 비해 나의 출판물에 대한 조급함이 없습니다. 작품이 썩을 것도 아니니 언젠가는 될 거라고 하는 심정입니다.
“빨리 책을 내세요, 그렇지 않으면 전에 쓴 것들은 구닥다리가 될 수 있어요.”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구십 살을 목표로 삼았으니 서두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내와 나는 배움을 향해 꾸준히 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함께 작품전시회와 출간기념회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