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하늘 구멍. 20220809
번쩍하고 번개가 내 눈을 스치더니 뒤따라온 천둥이 건물을 뒤흔들었습니다. 폭탄이 연이어 터지는 소리입니다. 두 손이 얼떨결에 귀로 향했습니다. 나는 지금 막 지루한 일을 끝냈지만,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유리문과 창들이 온통 물에 포위되었습니다. 창문을 깨뜨리고 나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빗방울이 못내 성을 누그러뜨리지 못합니다. 빗물은 썰매를 타듯 벽을 미끄러지다 튀어나온 창문틀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곧이어 용수철처럼 튕겨 허공으로 곤두박질합니다. 나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천둥이 물러가자, 나는 살얼음을 딛듯 눅눅해진 삼 층 계단을 지나 일 층 현관에 도착했습니다. 십여 미터 앞에 역전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곧 출발할 시간입니다.
‘비 사이로 막 가.’
한 사람이 우산을 펼치자마자 셔틀버스를 향해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달렸습니다. 빗줄기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차에 오르기 전에 이미 물에 빠진 고양이 꼴이 되었습니다. 우산을 접을 사이도 없이 몸을 차 안으로 숨깁니다. 그의 우산이 문 앞에서 빗물을 막아섰고 뒤따르던 빗줄기는 아쉬운 듯 버스의 지붕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출발 시간이 이분 남았습니다. 나는 유리 벽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보다가 몸을 돌렸습니다. 버스 앞까지 간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급한 사정이 없으니 아무래도 지체하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잠시 흐려진 유리창을 상대로 멍 때리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휴게실의 책상에 앉았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나는 지금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있습니다.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생각과 손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못다 읽은 동화책을 펼쳤습니다. 한 편의 이야기를 읽었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히 보기는 했는데 내용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다음 장을 읽을까 하다가 눈을 되돌립니다. 내 마음을 흔드는 빗소리에, 번개에,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험상궂은 천둥소리에 신경을 빼앗겼나 봅니다. 이번에는 뜨거운 차를 마시듯 눈이 천천히 문장을 따라갔습니다. 또다시 읽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세 번 읽자, 흐름을 겨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한 번 읽고 알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이게 뭐람.’
내가 동화책의 삼분의 이 정도를 읽었을 무렵 실내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점심시간이 막 끝나갈 무렵입니다. 직원 분들이 양동이. 마포, 빗자루 등을 가지고 출입문과 유리벽 가까이 달려들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바닥에 빗물이 흥건합니다. 내가 책에 빠져있는 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물은 이미 내 발밑까지 다가왔습니다. 일하는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가방과 책을 들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비 사이로 막 가?’
용기 없는 나는 비가 잦아드는 틈을 타 재빨리 셔틀버스에 올랐습니다.
잠시 주춤했던 빗줄기가 집에 이르자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유리 벽면이 폭포를 연상케 합니다. 깎아지른 절벽을 타고 물줄기가 낙하합니다. 빗물이 우리 집을 사방으로 포위했습니다. 밖을 내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허공뿐입니다. 35층, 늘 이것저것 보여주던 유리 벽은 반투명의 얼굴로 낯가림하고 있습니다.
“여보, 벗은 양말은 세탁기에…….”
“젖었어요.”
“그러니까요.”
배가 고프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집 밖의 상황이 궁금합니다. 재빨리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온통 흙탕물입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우수가 역류하여 맨홀뚜껑을 밀어젖혔습니다. 세찬 물줄기가 물기둥을 이루었습니다. 차도와 골목길은 온통 물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냉장고가 배라도 되는 양 물 위에 떴습니다. 자동차가 미끄러지는 듯했는데 한 바퀴 몸을 뒤집고는 떠내려갑니다. 인천, 서울, 경기, 강원의 피해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텔레비전 화면 아래에 자막이 띠를 이룹니다.
침수, 산사태, 홍수 경보, 안전지대로의 대피…….
저지대가 침수되면서 흙탕물은 길과 집을 삼킵니다. 폭우는 아직도 화풀이가 남았는지 내일모레까지도 세력을 잃지 않을 거랍니다. 큰 피해가 예상됩니다.
내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오늘만큼이나 무시무시한 폭우로 홍수가 났습니다. 앞 내의 물이 불어나 일주일 이상 학교를 빠졌습니다. 여름철 장마는 늘 무서웠습니다. 특히 밤은 공포의 대상입니다. 산골짜기에 자리한 우리 동네는 궂은날이면 암흑천지입니다. 등잔불이나 호롱불에 의지해서 밤을 지내다 보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절간만큼이나 고요합니다.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고 밝아지면 일어나는 과정은 습관화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의 천둥, 번개, 빗소리는 그날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린 마음에 두려움이 더 컸던 때문일까? 시작된 빗줄기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몇 날이 지속됐습니다.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하지만, 동네는 온통 물 천지입니다. 조용하던 동네가 동구 밖 개울물 소리에 파묻혔습니다. 번개와 천둥은 산천을 울리고 집을 송두리째 먼 곳을 향해 날려버릴 기세입니다.
어느 날 하룻밤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번개와 천둥은 산천을 떨게 했습니다. 이루기 힘든 잠자리가 잠시 포근해지는가 싶었는데 방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습니다. 할머니가 등잔불을 밝혔습니다.
“일어나, 어서 빨리…….”
나는 눈을 비비며 엉거주춤 일어섰습니다. 비바람이 화를 내듯 방안을 휘저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방문의 창호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벗어놓은 옷가지며 이불이 흥건히 젖었습니다. 뒷마당이 시끄럽습니다. 방문을 열자, 산에서 내려오는 큰 물이 좁은 뒷마당의 뜰을 넘었습니다. 뱀이 먹이를 노리듯 부엌으로 향해 있습니다. 삼촌은 괭이를 들고 앞마당으로 향하는 부엌의 문지방 밑을 깨뜨렸습니다. 흥건하던 물이 방향을 잡았습니다.
언제까지 지속되려는지 굵은 빗줄기와 번개와 천둥은 악마라도 되는 양 동네를 잡아 흔들었습니다. 새벽녘이 되고 빗줄기가 잦아들자, 아랫집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큰일 났네, 기둥이 쓸려갔어.”
빗물은 울타리를 넘어 아랫집을 거치고 아랫집을 거치고 또 아랫집을 거치면서 제멋대로 물길을 만들었습니다. 동화네 식구들은 집을 비우고 사촌 형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개울물이 넘쳤습니다. 동네 앞의 논두렁이 모두 쓸려갔습니다. 더구나 결혼을 며칠 앞둔 경수 형네 집이 허물어지고 논밭은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해 우리 마을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우리 동네뿐만 아닙니다.
‘옛날부터 불을 이기는 장사 없고 물을 이기는 장사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나라가 오랜 세월 홍수와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성과가 있기는 해도 하늘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나 봅니다. 그 예가 지금 바로 눈에 보이는 홍수의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몇 달 전에는 가뭄과 산불을 염려했었는데 홍수라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뭄과 산불, 폭우와 홍수는 끊임없이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인류의 무분별한 에너지의 사용과 자연의 훼손과 파괴는 재앙의 원인으로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할 것입니다. 영구 동토가 녹아내리고 해수면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전 세계의 학자들과 지도자들이 기후의 위기를 부르짖고 있지만 이에 비해 성과는 미미합니다. 오히려 자원의 훼손과 파괴, 에너지의 사용량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보다는 소를 잘 키우기 위해 서둘러 외양간을 고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전설 속의 의사 화타를 생각해 볼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