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하나면 됐지 20220826
들풀을 한 줄기 꺾었습니다. 박주가리입니다. 꺾었다기보다 잘랐다 하는 편이 옳습니다. 썰렁한 거실의 분위기를 살려보고 싶었습니다. 집으로 가져와 주둥이가 긴 병에 꽂았습니다. 창가에 놓았는데 의외로 마음에 듭니다.
십여 일이 지나자, 병 속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흰 점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지나자, 윤곽이 뚜렷합니다.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뿌리들이 병 속의 공간을 제집이라고 여기나 봅니다. 슬근슬근 뿌리를 아래로 밑으로 늘이고 있습니다. 줄기는 내 하얀 머리칼처럼 가는 뿌리가 애처로웠나 봅니다. 위로 오르지 못하고 뿌리를 따라갈 태세입니다. 보다 못해 궁리를 해냈습니다. 줄기가 의지할 수 있도록 음료수 빨대 굵기의 막대를 꽂아주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읽지 못하나 봅니다.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가는 실로 박주가리 줄기의 윗부분을 막대에 붙여주었습니다. 드디어 줄기가 바닥을 내려 보지 않고 위로 솟아오릅니다. 창턱을 넘을 태세입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문턱에서 머리를 꼰 채 머뭇거립니다. 병의 위치를 몇 뼘 왼쪽으로 옮겼습니다. 내 뜻을 알아차렸을까. 박주가리는 머리를 성큼 위로 밀어 올렸습니다.
‘여백의 미’
나는 쉰을 넘기면서 여백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채움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후부터는 덜어내는 데 마음을 둡니다. 그림에 마음을 가져가다 보니 일상에서도 내 주변의 사물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됩니다. 복잡하거나 혼잡스러운 상황을 단순화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세월은 나이만큼이나 물건들을 늘려놓았습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공간이 이것저것 낯익은 것들로 채워집니다. 어쩌다 보니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아직은 쓸만하다는 생각에, 이게 얼마를 주고 산 것인데 하는 아까운 마음에……. 유행을 떠난 옷가지며, 몸에 맞지 않는 옷가지가 옷장에 버티고 있습니다. 그밖에 효용가치를 잃은 물건들이 수납장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한 번은 마음먹고 옷장을 열었습니다. 몇 년간 입지 않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씩 꺼내 펼쳐 놓았습니다. 몸에 걸쳐보기도 했습니다. 보관할 것은 왼쪽으로, 버릴 것은 오른쪽으로 편을 갈랐습니다. 왼쪽의 옷들을 옷장에 넣었습니다. 다음엔 오른쪽의 옷들에 눈이 갑니다. 망설이는 가운데 다시 하나씩 둘씩 왼쪽으로 옮겨졌습니다. 결국 버린 것은 총각 때 입던 점퍼와 짝 잃은 정장 윗도리뿐입니다.
도서관을 다녀오는 중 길옆 나무 밑에 자주색 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맥문동입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가녀린 얼굴입니다. 가장 작은 꽃대를 꺾었습니다. 어려서 볼품은 없지만 목욕시키면 싱싱함을 뽐내며 오랜 시간을 버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걔걔, 이왕이면 크고 싱싱한 것으로 한 다발 가져올 것이지. 손이 그렇게 작아서야.”
손에 달랑 한 줄기 들려있는 꽃을 보고 옆집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습니다.
생각한 대로 목욕을 시킨 후 작은 잉크병을 닮은 유리병에 꽂았습니다. 넓은 식탁을 저 혼자 독차지했습니다. 촛불이 집안을 밝히듯 제 홀로 식탁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고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온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왕이면 몇 송이 더 찾아올 것이지 달랑 한 줄기가 뭐래요.”
“한 줄기가 뭐 어때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서 좋구먼.”
“그렇기는 해요.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정색을 하며 잘 알지도 못하는 ‘세한도’를 들먹였습니다.
“세한도를 알아요?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그림입니다.”
젊어서 볼 때는 그림 자체가 쓸쓸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즈음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뭔가 허전해 보이기는 해도 간결함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남이 들춰낸 장점들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여백이 마음에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앞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터에서 고들빼기 노란 꽃들의 무리를 보았습니다.
“여보 저 꽃 한 줄기 꺾어다가 꽂으면 좋겠지요.”
“아니, 나쁘지는 않은데 집에 있는 것이 시들면…….”
괜찮다는 마음에 하나둘 꽂다 보면 집안은 어느새 어수선해질 것입니다.
요즘은 집안이 왠지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가 아닙니다. 집안을 둘러보니 작년과는 달리 늘어난 것들이 많습니다. 책이, 악기가, 그림 용구가……. 새로운 것을 배우려다 보니 물건이 또 늘어났습니다. 아내가 청소기를 들었습니다. 푸념하기 전에 빨리 정돈해야 합니다. 더위가 한물가면 방 안을 한 번 뒤집어엎어야겠습니다. 우선 옷장을 열어 묵혀둔 옷들을 몰아내고, 몇 년간이나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들을 추방해야겠습니다.
무소유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없는 게 아니라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면 됐지.’
때에 따라서는 두 개가 필요할 때도 있기는 하겠지만……. 다음은 외줄기 노란 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