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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103. 산책길 20221107

by 지금은

아직 불빛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새벽을 알리는 하늘은 게슴츠레 졸린 눈을 겨우 떴습니다. 어깨를 있는 힘껏 뒤로 젖혔습니다. 폐부 깊숙이 상쾌한 공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좀 전까지 실내에 갇혀있던 가슴속의 공기를 몰아내야 합니다. 트럼펫이라도 되는 양 코를 반짝 들었습니다. 칠십오 도입니다.


전신을 타고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낙엽 깨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낙엽 차이는 소리도 들립니다. 아직은 가을입니다. 입동이라고는 하지만 가을 냄새가 물씬 익었습니다. 눈앞으로 성긴 단풍들이 안간힘을 씁니다. 입동을 가로막아 서고 있습니다. 나무를 떠나기 싫은 모양입니다. 작은 바람에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면서도 가지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밟히기 싫어.’


공원의 둘레 길에는 가장자리로 초록의 두 길이 선명합니다. 사람의 발걸음이 만들었는지 낙엽이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바람의 도움도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밟히고 깨진 낙엽의 잔재들이 길의 중앙으로, 길의 가장자리를 넘어 두 갈래로 편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길의 오른쪽을 걷고 있습니다. 밤새 내린 낙엽이 눈처럼 ‘군데군데’ 바닥을 덮었습니다. ‘살그락살그락’ 낙엽 흩어지는 소리가 신코를 타고 올라옵니다. ‘바작바작’ 낙엽 깨지는 소리가 신코를 타고 귓전을 울립니다. 절간처럼 조용한 새벽은 소리를 크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내 작은 인기척에도 놀란 새들이 ‘푸드덕’ 나뭇가지를 박차고 저편으로 날았습니다. 이에 놀란 낙엽도 새를 쫓아 비행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나 봅니다. 몇 개의 낙엽이 내 시선을 무시한 채 낙하합니다. ‘펄럭펄럭’ 좌우로 파도를 타더니만 이내 힘을 잃었습니다. 스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엉겁결에 잡았습니다. 너무나 빨랐습니다.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아무 생각 없이 손이 반응했습니다. 아직은 생명이 있는 듯 부드럽습니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손에 바람기만 느꼈을 뿐입니다. 도토리나무 잎입니다. 희미한 상태이지만 늘 눈에 익은 모양이니 마음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다 알 수 있겠구나, 도토리가 없어진 이유를.’


지금까지 위에서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으니 하는 말입니다. 잠시 망상에 빠졌습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도토리나무 밑은 한동안 수난을 겪었습니다. 흙바닥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집중적으로 바닥을 공략했습니다. 도토리는 떨어지자마자 납치당했고 남은 것은 텅 빈 도토리 모자뿐입니다. 곡식의 쭉정이처럼 갈 곳을 몰라 발바닥에 밟힌 채 여기저기에 희미한 흔적을 만들었습니다.


“열매를 채취하지 마십시오. 범칙금 부과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십만 원”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십만 원이 코끼리 비스킷 정도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플래카드 주위에도 도토리의 씨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고장에서 아직 범칙금을 부과받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으름장에 놀라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공원을 한 바퀴 돌았을 무렵입니다. 주위의 사물들이 선명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높은 빌딩의 윗부분이 노랗게 물들고 있습니다. 점차 노랑이 붉음으로 변합니다. 나무 밑의 사람은 검은 그림자에서 제 색깔로 나타났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새벽부터 씨름하는 모습 같습니다. 나는 그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독수리의 기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과대망상에 빠집니다. 도토리를 줍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나무를 흔듭니다. 발길질하기도 합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어렸을 때 알밤 줍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낮에 줍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늦잠꾸러기인 내가 새벽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형과 고모가 이른 아침 뒷동산에서 주워 온 밤을 보는 순간 샘이 났습니다. 나는 다음날 뒤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의 옆자리를 벗어나 문지방 밑을 차지했습니다. 형과 고모가 잠에서 깨면 문지방을 넘을 게 분명합니다. 몇 번인가 인기척에 눈을 떴지만, 형과 고모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들립니다. 할머니는 어느새 군불을 때고 계십니다. 쇠죽을 끓이십니다.


“잠꾸러기가 왜 나왔어.”


“밤 주우려고.”


“비가 내리려나 보다. 들어가렴.”


슬그머니 할머니의 눈을 피해 바구니를 들고 뒷산으로 갔습니다. 산기슭은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적막을 깨뜨리려는 듯 이따금 ‘후드득후드득’ 열매들이 땅을 때립니다. 밤알들이 흩어지고 구릅니다. 소리를 어림잡아 몸을 움직입니다. 먼동과 함께 빗방울이 굵어집니다.


“할머니!”


바구니를 내밀었습니다. 형과 고모가 어제 주워 온 것만큼이나 많습니다.


할머니는 기쁨보다는 내가 더 걱정되었던 모양입니다.


“어두운데 거긴 왜 갔어, 비도 오는구먼.”


아침을 먹는 동안 할머니가 내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동안의 게으름이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려고 가는데 모과나무 밑에 세 노인이 엉거주춤 서 있습니다. 한 분이 나뭇가지로 모과 열매를 겨눕니다. 두 개의 나뭇가지를 이어 붙였지만, 한 뼘은 모자랍니다. 장대는 열매에 이르지 못하고 이 나뭇가지 저 나뭇가지만 성가시게 합니다. 나와 함께 걸음을 멈추었던 젊은 여인이 말했습니다.


“할머니 필요하면 주워가세요.”


“남이 다 주워가서 주울 게 없어요.”


“그거 없다고 뭐 사는 데 지장은 없겠지요?”


발걸음을 옮깁니다. 내 등 뒤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열매를 함부로 따면 불법이니 아들, 며느리가 알면 걱정을 많이 할 거랍니다. 이 말에 노인들이 엉기적대며 비탈을 내려섭니다. 늙어도 자식 걱정은 끝이 없나 봅니다. 이 흔한 열매가 아직도 옛날의 귀한 열매로 눈에 비쳤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유년 시절 어쩌다 모과 하나가 생겼는데 동네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 일이 있습니다.


‘얄미운 모과.’


나는 마음속으로 노인들에게 열매를 하나씩 따 주었습니다. 하찮은 공범 주제에…….

이 세상에 공범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니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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