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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어느 날

135. 그래도 영어 한마디. 20221212

by 지금은

뒷모습이 예쁩니다.


“,얘야, 여기 여기야.”


나는 나비처럼 팔랑팔랑 뛰어가는 아이를 향해 손으로 가리키며 몇차례 불렀습니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지만 자신을 부른 줄 모르는 모양입니다. 코너를 돌기 전에 소리를 높여 불렀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빈 곽을 휘두르며 발을 더 높이 듭니다.


“Come here. (이리 와)”


그제야 꼬마가 뒤를 돌아다봅니다. 미소를 지으며 손 흔든게 전부입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매일 아침이면 한 시간씩 텔레비전에서 왕초보 영어 회화를 시청합니다. 뭐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외국 사람과 의사소통이 필요합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시작된 영어 공부가 아직도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시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부했고 사회생활을 할 때는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서양 사람들과 마주칠 때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하지만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용기 있게 다가서 부딪쳐야 하는데 마음뿐입니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말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한 경우는 없습니다.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지만 영어에는 더 자신감이 없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영어 습득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분명한데 노력은 변변치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뿐입니다. 꾸준히 해야 하는데 늘 시작과 끝이 같지 못했습니다.


새해가 되면 영어 공부를 마음먹고 해 보겠다며 버킷리스트에 첫머리에 넣었습니다. 최전선으로 나가는 군인의 마음처럼 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총 대신 연필을 들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연습장이 까맣게 되도록 단어를 쓰고 쓰던 기억을 되살려 공책을 마련했습니다. 조그만 수첩도 손에 쥐었습니다. 단어장 역할입니다. 영어의 문장이나 단어가 머릿속에서만 놀아서는 부족하다기에 입놀림도 했습니다.


“뭐 해, 새해 첫날인데 집에만 있어서 되겠어.”


친구의 말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들었던 연필을 놓고 몇 개의 단어가 어깨를 나란히 한 공책을 덮었습니다. 빈 여백은 겉옷과 바지를 입지 않은 것처럼 허전합니다. 꾸준하지 못했을 때 흔히 쓰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내 곁에 머물렀습니다.


새해뿐이겠습니까.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내 머리를 자극할 때가 있습니다. 영어가 필요하다고 느낄 무렵입니다.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해내야지.’


다시 책장에서 잠자는 준비물을 끄집어냈습니다. 책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영어책과 공책은 슬그머니 귀퉁이로 밀려났습니다. 우선 급한 것부터 눈에 들어옵니다. 어느 날 또다시 책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전철 승강장에서 있던 일입니다.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여행용 가방을 끌고 벽에 붙어있는 지도에 다가갔습니다. 순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조용히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전철의 노선을 짚어갑니다.


“어디를 찾으십니까.”


눈이 마주쳤지만 갑작스러운 물음에 어리둥절한 모습입니다.


“도와드릴까요? (Can I help you?)


인사동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철을 함께 타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종로에서 친구들과 합류하기로 했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내가 내려야 하는 역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침묵했습니다. 이 짧은 영어가 나를 어색하게 했습니다. 상대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에 자신이 없다는 표시로 우리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만국 공통어를 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니는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하니 부평역에서 외국인에게 서울 방향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거절을 했습니다. 친절을 베풀고 싶은데 마음 같지 않았습니다.


‘늦지는 않은 게지.’


생각할 때가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하지는 못해도 놀이라 생각하고 아침마다 왕초보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스페인에 갔을 때 광장에서 일행을 놓치고 잠시 헤맨 일이 있습니다. 당황해서 진땀을 뺐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쇼핑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왕초보 영어 회화’


시간에 맞추어 몰입이든 건성이든 꾸준히 시청하고 등장인물을 따라 입을 놀립니다.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여러 번 되뇌고 글씨로 손바닥을 간질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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