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누구나 쓰는 에세이 20221216
꾹 눌렀습니다.
답이 왔습니다. 마감일을 지켰습니다. 마음이 후련한 건지, 답답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쓰는 에세이.’
쓰는 것이 좋아 무조건 강의 프로그램에 등록했습니다.
걷기를 이십여 분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다시 이십여 분을 걸어서 도서관에 도착했습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한 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을 걷고 타기를 반복했습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이유, 몸에 밴 절약 정신으로 차비를 아껴야 한다는 이유, 한쪽에만 손을 들어주기가 애매해서 두 곳에 점을 찍습니다.
강의를 해주는 사람은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개를 듣고 보니 명성에 비해 탄탄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느낌이 듭니다. 책을 열 권이나 냈다고 했습니다. 강의를 듣는 동안 도서관에서 마련한 자신의 책을 두 권이나 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의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부피가 얇고 제목마다의 내용이 짧고 줄거리가 단순해서 읽기가 쉽습니다.
‘아, 이런 거였군.’
깊이 이해하기보다는 음미하는 가운데 책장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초고는 쓰레기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막 쓰세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초고부터 되도록 완성된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세 차례의 강의가 끝나고 과제를 받았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은 강의로 끝을 맺는 게 아니라 결과물을 남기는 과정입니다. 앞으로 강의 때마다 수강생들이 총 세 편의 글을 써서 종강 때 책을 손에 지니도록 할 생각입니다. 강사의 마음도 듣는 사람들도 마음이 바쁩니다. 지금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책을 갖고 싶어 모였습니다. 하지만 촉박한 일정에 모두 긴장의 빛이 역력합니다.
“언제 다 써요. 글재주도 없는데.”
나는 이들과는 달리 긴장이 되지 않습니다.
‘뭐 그냥 쓰면 되는 거지.’
글의 소재가 떠오를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습관 때문인지 모릅니다. 강사가 말한 세 편의 주제 중 하나의 글은 이미 완성돼 있습니다. 한 달 전에 평생학습관에서 ‘쉼터’라는 프로그램으로 그림책 강의가 있었습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가운데 보고 싶은 친구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중학교 때의 친구를 떠올리며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강의를 듣는 동안 두 편도 어렵지 않게 소재가 떠올라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세 편중 우선 한편을 메일로 보내주세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글을 차례로 감상평을 하기로 했습니다. 한순간 수런수런 수강생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부담감은 느끼지 마세요. 초고는 쓰레기나 다름없으니까.”
강사의 지도 조언이 있고 수강생들의 감상평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평을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니 긴장할 것도 없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는가 봅니다. 강의가 끝났을 때 성큼 강사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매를 맞겠습니다. 호되게 때려주십시오.”
“아니, 비난하거나 헐뜯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아보려는 겁니다.”
나는 가장 먼저 평가받기를 원했습니다.
다음 시간입니다. 생각대로 호된 매를 맞았습니다. 제출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퇴고를 잘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이 드러났습니다. 자만심도 한몫했습니다. 초고는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입니다.
내가 착각한 일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보는 순간 드디어 내 책을 무료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만들어 준다기에 수강생의 모음집이 아닌 개인마다의 작품을 책으로 만들어 주는 줄로 알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참가했지만, 예상과 어긋나 첫 수강 시간 실망했습니다.
지금의 심정은,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올라 빵이 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소재를 찾아 쓰는데 만 몰두했지, 글을 다듬는 일을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습니다. 내 실력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동료들의 글을 함께 읽으면서 나는 아직 초보자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작가가 되려고 모인 사람들이니 글솜씨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주제가 뚜렷하고 글 내용의 흐름이 매끄럽습니다.
일주일 내내 매달려 퇴고했지만, 읽을 때마다 보이는 허점이 머리를 뒤숭숭하게 했습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펴내기 전 100번 이상이나 손을 보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썼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퇴고의 중요성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책을 받아 들 날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