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언덕으로 보이던 곳이 산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0210311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바라보는 곳은 앞산입니다. 집에 머무는 동안에도 심심하면 바라봅니다. 언제 보아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은 말합니다.
“바다의 전망이 끝내줘요.”
향이 다르니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말하는지 모릅니다. 가끔 의구심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일 년 내내 변화를 보이지 않는 바다가 뭐 좋다고, 그날이 그날이지 뭐.’
지나치게 강조하고 돌아서는 그의 뒤통수를 보면서 두세 번 같은 말을 되뇌었습니다.
앞산은 나와 인연이 깊습니다. 삼십여 년을 한결같이 눈 맞춤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산의 옆구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주위는 허허벌판입니다. 우리 집 눈높이보다는 좀 높지만, 고개를 들면 봉우리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베란다에서 마주할 수 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산은 나를 쉽게 받아주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은 망원경이라면 가까이하는 것은 현미경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나는 주로 산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낍니다. 훼손되지 않은 산은 이른 봄 나에게 복수초를 선사합니다. 생강나무가 노란 꽃을 피웁니다. 산기슭에는 복숭아꽃이 뒤를 따릅니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는 아카시아꽃이 내 눈과 코를 홀립니다.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 꽃을 한 송이 따서 입으로 가져갑니다. 맛보다 향이 먼저 나를 자극합니다. 찔레 순처럼 별맛이 없어도 맛있던 것처럼 느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맞아 시장이 반찬이지.’
한여름이야 뭐 녹음 짙은 그늘이 최고입니다. 저 혼자인 양 매미가 숲 속의 긴 한나절을 차지합니다. 동식물의 철입니다.
가을은 가을대로 좋습니다. 내장산이나 설악산에서 즐기는 단풍은 아니어도 십여 분 가까이에서 눈요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디입니까. 도토리 몇 알을 주웠다가 도로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어느새 다람쥐가 쪼르르 다가와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겨울 식량을…….’
꿩이나 청설모도 함께할 식량입니다. 눈 쌓인 겨울 산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나는 이 산에 정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산의 앞 방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십여 분 거리입니다. 내가 창가에 서면 산봉우리와 눈높이가 일치됩니다. 올려보던 모습이 나와 대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꼭 미련은 둔 것은 아니지만 주거 환경을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하다면 지금이 좋습니다.
지금은 매정하게도 지금은 앞산에 가지 않습니다. 다정했던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을 대신합니다. 주위의 환경이 나빠졌습니다. 시골스러운 맛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넓은 도로가 개설되고, 다리가 놓였습니다. 산 중턱에는 내 안경을 뒤집어 놓은 모습을 한 터널도 생겼습니다.
바라만 보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겨우내 발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봄부터 앞자락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던 작은 집들이 어느 날 자취를 감췄습니다. 기계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화물차가 들락거립니다. 곧이어 흙이 파헤쳐지고 반듯반듯한 길들이 공터를 감쌌습니다.
‘공원을 만드나? 택지를 조성하나?’
궁금합니다.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없어 사진을 찍어 큰 텔레비전에 확대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들어설지는 모르지만, 정리된 공터입니다.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꽃이나 나무라도 심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덩그러니 해를 넘겼습니다. 갑자기 궁금합니다.
점심을 먹은 후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몇 차례의 걸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에 이르는 길은 분진과 소음이 나의 마음을 거슬립니다. 변한 게 있나 했지만 전에 사진에서 보았던 그대로입니다. 정상을 향해 오릅니다.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자연미라는 것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인공으로 조성된 공원은 인공구조물입니다.
내가 때에 맞춰 찾던 뽕나무는 지형의 변화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오디 맛 생각에 입 안에 침이 고이지만 그림일 뿐입니다. 봄이면 빨갛게 수놓던 진달래나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헉헉대며 비탈길을 오릅니다.
‘아, 다행입니다.’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진달래나무들이 양지바른 한쪽 비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록 인공 조림이지만 앞으로 꽃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 한동안 자리에 멈춰 차근차근 둘러보았습니다. 정상에서 잠시 땀을 식힌 후 반대편 중턱에 이르렀습니다. 넓게 조성된 공간에는 여러 가지 운동기구들이 자리했습니다. 달리기 코스도 있습니다. 산이 예전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뒤편에는 코앞에까지 아파트들이 들어서 산을 외워 쌌습니다.
인간의 뜻에 따라 자연은 변합니다. ‘둘레길’ 이름은 좋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조금은 불편함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다시금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웁니다.
삼십여 년 전에는 산이 아니라 언덕이라고 여기고 힘들이지 않고 오르내리던 길입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이 등과 이마에 흐르고 다리에 힘이 들어갑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방향을 바꾸어 전에 살던 집 근처를 지났습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변해갑니다. 한 주먹이던 가로수의 둥치가 어느새 한 아름이 되었습니다. 다리를 건너다 산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원래 언덕은 아니고 산인 걸 어쩌겠나.’
남은 나무와 풀들이 산을 지키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