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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Nov 23. 2024

2021 그날

58. 이 가을 차 한 잔 어때요. 20210530

국화차를 마시자고요, 나는 참을성이 부족한가 봅니다. 그윽한 맛과 멋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국화차 하면 떠오른 것이 정취인데 지금도 그 느낌과는 거리가 멉니다.


국화차요, 그렇습니다. 고요가 있고, 담백함이 있고, 그 무엇보다도 향이 있습니다. 차라는 것이 대개는 향을 가지고 있지만 국화차는 그만의 그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국화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녹차처럼 잠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나는 기다림이란 것에 대해 익숙한 편이지만 차와 음악에 대해서는 다릅니다.


7초 정적, 견딜 수 있나요


카타리나 바비에리(Caterina Barbieri)라는 이탈리아의 일렉트로닉 뮤지션이 있습니다. 대표 앨범 ‘의식의 패턴(Patterns Of Consciousness)’ 첫 곡을 들어보면 첫 멜로디가 나온 뒤 잠깐 정적이 흐릅니다. 칠 초입니다. 잔향 빼고는 아무 음도 나오지 않습니다. 잠시 후 음향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들을지 말지 망설여집니다. 몇 초 아니 찰나에 결정하는 세상에 용감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달 후 문득 그때가 떠올라 그 칠 초의 여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답은 반대입니다.


“당신은 이 짧은 시간을 어떻게 생각해요?”


“뭐 잠시 기다리면 되지요.”


때로는 정적을 견딜 수 있어야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처음 ‘의식의 패턴’을 접했을 때 하마터면 감상을 그만둘 뻔했습니다. 갑자기 음향이 끊기자, 뭐 잘못된 거 아니야, 내 오디오가 고장이 난 거 아니야 하는 순간의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습니다. 다행인 것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음향이 나타나 나를 달래주었습니다.


장소나 시간 상황에 따라 기다림의 차이는 다름을 알게 합니다. 탈것에 대한 기다림의 시간,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 갑자기 탈이 나서 공중화장실에서 기다리는 시간.


장황한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무슨 마음으로 국화차라는 제목을 올렸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분명 기다림의 시간, 느긋한 노후를 즐기라는 의미가 분명합니다. 의도대로 나는 예전에 비해 마음의 여유가 있고 느긋함을 추구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선생님만큼이나 아내도 같은 말의 연속입니다.


“뭐가 그리 급해요. 입 데겠어요.”


커피를 마실 때면 나는 아내보다 두서너 배는 일찍 잔을 비웁니다.


며칠 전에 형님 내외분과 함께 조카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카딸은 시골의 정취에 맞게 국화차를 준비했습니다.


“어때요, 향이 좋지 않아요. 전원생활이란 게 뭐 이런 거 아니겠어요.”


지난해 서리 맞은 들국화를 손수 말려 준비했다고 합니다.


창가에 앉아있던 나는 잠시 잔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하늘이 잔에 내려왔네. 가을 향기가 살고 있네. 겨울이 따라왔고, 봄도 찾아왔어. 오라! 그래서 노랑이군 그래.”


“작은아버지, 글을 쓰시는 거는 알지만 지금 보니 시인이시네요.”


“맞아, 원시인. 옛것이나 떠올리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시간이 길어진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입니다. 찻물이 몇 차례 데워지기는 했어도 술도 아니고 종지보다 좀 큰 찻잔을 두고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화차가 아직은 내 입에 어울리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든 친근해지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만남이 필요합니다. 어쩌다 국화차 한 잔이 매일 마시는 커피와 비교되겠습니까.


친구는 칡꽃차가 좋다는군요. 또 다른 이는 생강차가, 금송화가, 결명자가, 대추가……. 그렇다고 입에 맞는 차를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맛을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내가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선비들이나 불교 안에서의 차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색을 음미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어디 생각대로 됩니까. 사색할 사이도 없이 잔을 비웠습니다.


오늘도 가까이에서 전해오는 아내의 낮은 말소리가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입술 데겠어요.”


‘그래 맞아, 천천히, 더 천천히.’


쇼팽의 야상곡을 들어야겠습니다. 눈을 감습니다. 빈 잔의 국화 향이 가물가물 피어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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