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걷기의 즐거움 20210813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내가 막아섰습니다.
“이 뙤약볕에 나간다고요. 저녁노을이 질 때면 좋을 텐데.”
“맞아, 노을이지.”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말복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한낮에는 열기에 몸이 후끈 달아오릅니다. 나는 날씨에 구애받는 사람은 아닙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고 추우면 추운 대로 적응하려고 합니다. 바람을 쐬고 싶으면 웬만한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가 아파트의 중간 높이에 매달렸을 때 아내는 감자 한 개와 옥수수 반 개, 양배추 한 줌을 접시에 담아 내놓았습니다. 나가면 저녁 시간을 지나 어두워서야 돌아올 것을 짐작했음이 틀림없습니다. 함께 살다 보니 내가 나갔다 돌아올 시간을 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내의 말대로 노을이 붉어질 즈음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노을을 자주 감상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본 것은 일 년에 몇 차례 되지 않습니다. 마음먹고 나왔는데 너무 일찍 나와 기다리다 내일로 미루기도 하고, 너무 늦게 나와 사라진 노을을 서운해하기도 했습니다.
집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 공원으로 들어섰습니다. 내 집 주위로는 곳곳이 공원입니다. 오늘은 중앙공원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소나무밭을 지나 호숫가로 접어들었습니다. 어느새 노을이 호수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보트가 물 위를 지나가자, 노을빛이 물결에 일렁입니다. 나무와 풀이 방향에 따라 붉게 또는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내가 발길을 옮기는 동안 빛은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의 모습들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습니다.
나무와 풀들을 감상하다가 한 곳에 멈췄습니다. 클로버입니다.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게 네 잎 클로버입니다. 그 많은 클로버 중에 네 잎이 한눈에 쏙 들어왔을까. 조심스레 줄기를 들어 올립니다. 주위를 살펴봅니다. 네 잎 클로버가 발견된 곳의 언저리를 살펴보면 또다시 발견할 확률이 높습니다. 잠시 몸을 고정하고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습니다. 포기해야겠고 눈을 돌리려는 순간 네 잎 클로버가 보입니다. 숨바꼭질하다 들킨 것처럼 수줍은 모습입니다. 살그머니 줄기를 들어 올렸습니다. 내 옆을 지나가던 사람의 눈이 내 손에 잠시 멈췄습니다. 자랑하듯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습니다.
‘하나 주시면 안 될까요.’
상대가 이런 말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는 내 마음을 읽지 못했나 봅니다. 몇 발짝 엇갈려 지나가 멈추더니 나처럼 클로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분명 네 잎 클로버를 찾는 모습입니다. 꼬마 아이라면 몰라도,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는데 구태여 내가 먼저 클로버를 내밀기에는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고개라도 좌우로 젓는다면 난감합니다. 어느 날 꼬마에게 장난감을 주려고 했는데 한사코 고개를 흔들었을 때가 기억났습니다. 전혀 생각 못 한 반응에 잠시 쑥스러웠습니다.
클로버를 쫓던 발걸음이 끝났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른 때문입니다. 눈이 서쪽 하늘을 향했습니다.
'뭐야.'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숨어버렸습니다. 수평선에는 희미한 잿빛 줄기만 띠를 둘렀습니다. 호수의 물도 흐려졌습니다.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나올 때 이만 보를 채우기로 마음먹었는데 어긋날 것 같습니다. 노을은 이미 놓쳤고 걸음이라도 채워야 합니다. 호수가 끝나는 곳에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골프장 뒤편을 지나 대학교로 접어들어 교정을 한 바퀴 돌고 집에 도착하면 목표치에 도달하지 않을까.
방파제를 사이에 두고 사잇길을 걷다가 다시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어느새 가로등이 반짝하고 짙어지는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눈이 부십니다. 갈대가 불빛에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낮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연극배우 중 주인공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는 느낌입니다. 가로등 바로 아래 서 있는 바로 나입니다. 내 발등이 유난히 밝게 보입니다. 모습을 하나 남기고 싶어 휴대전화를 꺼냈습니다. 한 장이 아니라 요리조리 내 얼굴을 중심으로 몇 장을 더 찍었습니다. 어느새 생각하지 않았던 클로버가 발끝에서 올려보고 있습니다. 갈대와 사진에 홀려 클로버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행운을 하나 더 찾아야겠습니다. 이번에는 쪼그려 앉아 밝은 불빛에 하나하나 살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렀습니다. 더는 찾지 못하겠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네 잎 클로버와 눈이 또 마주쳤습니다. 클로버 줄기를 쥐고 가로등을 따라 걸었습니다. 밝음이 짙어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합니다. 골프장 앞에서 멈췄습니다. 뒤쪽으로 갈까, 앞쪽으로 갈까 망설이다 앞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뒤쪽은 낮과는 달리 으스스한 느낌이 듭니다. 대학교의 교정은 한산합니다. 덩치 큰 건물들이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나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보호해 주는 내 그림자가 교정으로 안내했습니다. 내가 걸으면 함께 걷고 멈추면 함께 멈춥니다. 방범등을 따라 앞서기와 뒤서기를 반복합니다. 순간적으로 숨기도 합니다. 그림자도 위험을 인식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내 안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만 돌아가야지. 마냥 느려지던 발걸음이 교정을 벗어나자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손에 쥔 네 잎 클로버는 어느새 시들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을 몇 개 지나쳐 집에 이르렀습니다.
“뭐, 이렇게 늦게 돌아오는 거요.”
“행운을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나는 네 잎 클로버를 내밀었습니다.
‘하나는 당신 것, 하나는 아들 것, 하나는 내 것’
아내는 클로버 잎을 가지런히 펴서 책갈피에 꽂았습니다. 노을을 놓쳤고 2만 보도 놓쳤지만, 기분이 좋습니다. 걷는 즐거움, 별것 아닙니다. 걷는 자체가 즐거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