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모방의 변화 20211013
나는 강의 듣기를 좋아합니다. 코로나19가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전까지는 주로 대면 강의를 들었습니다. 우리 고장에 있는 대학이나 평생학습관, 복지관, 도서관 등을 찾았습니다. 시민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많습니다. 문학, 미술, 음악, 역사 등 다방면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꼭 무엇을 배워야겠다는 마음보다는 듣는 것이 마냥 좋았습니다.
지금은 대면 강의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비대면 강의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과의 접촉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홍보가 있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이용한 강의는 다른 세상입니다. 어제는 어느 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무료 강의를 수강하기로 했습니다. 독서지도와 미술 교육입니다. 늘 관심을 두는 분야이니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미술교육 둘째 시간입니다. 어린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그림 그리기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점, 선, 면을 이용한 간단한 표현입니다. 재료도 간단합니다. 검은 도화지와 연필 모양의 흰 수정액 펜이 전부입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짧은 시간에 자신의 그림 세계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림은 흑백입니다.
강사가 어린이를 지도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요즈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림책과의 연관을 지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잠시 강의가 끝나갈 무렵 듣기를 멈췄습니다.
‘눈사람과 눈 오리’
작년 겨울에 집 앞의 공원을 산책하다가 중학생 정도의 여자애들이 눈 오리와 눈사람을 만들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공원의 새들만큼이나 재잘대는 소리에 잠시 멈춰 그들의 놀이를 지켜보았습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소꿉놀이라도 하는 양 그 모습이 다정해 보였습니다. 나는 눈 오리 만드는 기구를 보고는 손자나 손녀가 있다면 하나쯤 사서 함께 놀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릿속에 불쑥 솟아오른 소재가 사라질까 봐 재빨리 강사의 그림을 스마트폰에 담고 밑에 ‘눈사람과 오리의 여행’이라고 적어 넣었습니다. 아이들은 눈 오리를 만들어 놀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그늘막에 그대로 놔두고 가버렸습니다. 아이들처럼 오리도 집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가끔 어린이들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고 동화 속 세상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길 건너편에 있는 꼬마 눈사람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야 합니다. 날이 어두워지니 가기는 가야 하는데 마땅히 돌아갈 집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은 눈 오리의 집도 눈사람의 집도 없습니다. 오리와 눈사람을 탄생시킨 아이들의 집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찾아가야겠습니다. 힘들게 찾아갔지만,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씨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배려입니다.
“너희들은 실내로 들어오면 안 돼.”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오게 됩니다. 다음의 이야기가 이어져야겠지요. 잠시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습니다.
멈추었던 강의를 다시 듣습니다. 아이들의 머릿속은 무궁무진한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을 지도하는 목적은 그들의 다양한 생각과 활동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강의 계획서를 보니 그림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를 서슴없이 나타내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다양한 표현의 기법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나는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의 자체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복습의 효과와 내가 알던 기법 외에 다른 방법도 배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 내용을 공감하며 어린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동심의 세계를 여행하고 나면 고개를 좌우로 젓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야.’
되지도 않는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금 동화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주제를 잊기 전에 서둘러야겠습니다.
재빨리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눈 오리가 활동하는 장소의 배경을 담아야 합니다. 집 앞 호수공원으로 갔습니다. 먼저 오리 배를 찾았습니다. 부둣가를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여름 내내 물길을 오르내리더니만 자취를 감췄습니다. 대신 다른 모양의 배들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급한 마음에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중에 바꾸면 됩니다. 큰 배를 찍고 정자도 찍었습니다. 오줌싸개 동상 등 이것저것을 되는대로 찍었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오다가 얼어붙듯 길 가운데에 멈췄습니다. 눈 오리의 활동무대는 겨울인데 하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습니다. 이제 막 단풍이 엿보이는 가을인데 잠시 눈 세상을 머릿속에 담고 다녔습니다.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어찌하겠습니까. 겨울은 아니지만 나는 눈밭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터벅터벅 발길을 옮깁니다. 잠시 환상이었다고는 해도 무엇인가 얻은 것에 스스로 위로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배경이지만 이건 겨울의 장소야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되면 기다렸다가 배경을 바꾸면 됩니다. 작사가 먼저냐, 작곡이 먼저냐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남의 말과 생각을 빌려 자신의 곳간을 채우는 일이 많습니다. 모방이 또 다른 창조를 일구어냅니다. 과거와 현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곧 미래의 자산입니다. 역사의 흐름입니다. 불이 밝혀진 식탁에는 어느새 음식들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봅니다. 재빨리 의자에 앉았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눈 오리와 씨름을 해야 합니다.
‘눈사람과 눈 오리’의 여행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겨울이 다시 다가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