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묵은해의 상 20240102

by 지금은

“줄 거면 빨리 줘야지.”


아내의 말입니다. 하지만 머뭇거렸습니다. 벌써 보름째나 됩니다. 처음 말이 나왔을 때 아내는 심드렁하다는 눈치였는데 몇 차례 같은 말을 하자 관심을 보입니다. 무엇을 준다고, 누구에게 준다고 남이 들으면 궁금해하겠지만, 나와 아내는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미리 말하면 내가 받을 상입니다. 상품이라고 하면 더 좋겠습니다. 내게 줄 상을 내가 고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내 결심도 있었겠지만 누군가 나에게 주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전히 나와 나의 관계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오늘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늦기 전에 서두르라고 합니다. 아침에 말하더니만 점심 때도, 아니 저녁을 먹으면서도 재촉합니다. 상에 대해 몇 번 말한 것도 아닌데 귀에 못이 박혔을까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학습관에서 글쓰기를 배울 때입니다. 강사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새해가 되면 일 년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답니다. 그의 진행과정은 일 년 단위입니다. 새로운 것을 한 가지씩 해봅니다. 그의 실천기가 이미 책으로 엮어 나왔습니다. 나는 참가자 중 연장자라는 이유로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이 생겼지만,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따라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자신의 결과물을 챙기며 계획보다 앞섰다 싶으면 보상을 합니다. 보상이라야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은 아니고 소소한 것입니다. 식사를 한다면 평소보다 조금 나은 것으로, 물건을 산다면 조금 독특한 것으로……. 대개 이런 식입니다. 때로는 친구를 불러 함께 회식을 하기도 하고 가까운 곳을 하루 정도 둘러보기도 합니다.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독이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십이 월이 되어 결과물이 완성되었을 때는 함께한 단짝 친구와 다소 풍성한 파티를 합니다.


나도 파티를 해야겠지요? 그만두었습니다. 각자 이루고 싶은 무엇인가를 위해 약속한 친구가 없습니다. 오로지 나 혼자의 결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보상은 꼭 해야겠다는 마음은 굳힌 상태입니다. 나처럼 아내도 올해 이룩한 게 있습니다. 펜 드로잉입니다. 새해 초기는 아니지만 더위가 한창일 때 시작했습니다. 꾸준함이 무기였을까요. 처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더니만 학습관에서 지도를 받고 잘하는 사람들의 스케치를 눈여겨보더니만 눈에 띄게 향상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나자 슬그머니 아내에게 맛있는 것을 대접했습니다. 내년에도 계속하는 게 어떠냐고 운도 띠웠습니다. 흥미 있나 봅니다. 고개를 끄덕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그린 것들을 거실 바닥에 펼쳤습니다.


“와! 전시회를 해도 되겠네.”


아내의 미소가 살며시 입가에 번집니다. 몇 장을 골라 액자에 넣어 벽에 걸었습니다. 줄에 매달린 그림이 전시회의 벽을 메운 듯합니다. 잠시 세상살이가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동안 눈여겨보았던 가방을 보였습니다. 의아해하는 아들에게 내 상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며 아내도 거들었습니다.


미리 말하면 오늘 우리 세 식구가 외식을 했습니다. 카페에서 몇 시간이나 수다를 떨었습니다. 아들이 가방에 대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동안 가방을 바꾸라는 아내의 성화를 무시했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여 많이 낡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의미 있는 가방입니다. 정년퇴직을 하며 앞으로 배움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결심으로 마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별을 하기가 서운합니다. 잠깐만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데 아들은 어느새 구매 버튼을 눌러버렸습니다. 내 상품이 확정된 순간입니다.


올해의 계획은 무엇이더라, 기타, 리코더, 오카리나, 칼림바, 아닙니다. 하모니카 연주입니다. 꼭 두 곡입니다. 능숙한 연주를 기대합니다. 생각난 김에 책꽂이 한 옆에 잠자고 있는 하모니카를 꺼냈습니다. 뚜껑을 열었습니다. 얌전한 모습으로 반짝 불빛에 몸을 드러냅니다. 천으로 몸을 닦습니다. ‘후’ 입김을 불어넣습니다.


‘숨을 쉬고 있군요.’


바람소리를 받아들입니다. 내일부터는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여보 당신은 무엇을 하기로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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