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마지막 열매를 헤아리며 20240118
곡식이 여물었다. 과일이 잘 익었다.
‘여물다.’는 무슨 뜻일까요. ‘단단하게 잘 익다.’ 완성됐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나는 요즘 새로움에 빠졌습니다. 매일 적어도 한 번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 속에 모과가 있습니다. 겨울 그림치고는 꽤 괜찮다 하는 느낌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파란 하늘을 바탕 삼고, 흐린 날이면 재색 바탕 속에 포근히 몸을 묻고 있습니다. 어제같이 눈이 오고 진눈깨비가 날리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눈도 맞아보고 비도 맞아보고 바람도 맞아봅니다. 일 년의 삶을 하루에 다 맛보는 격입니다.
다른 모과나무는 열매를 이미 땅으로 보낸 후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데 우리 집 옆의 모과나무는 해를 넘긴 1월 중순인데도 꿋꿋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연둣빛 콩알만 한 게 더운 여름을 견디며 아기의 머리통만 하더니 노랗게 물이 들었습니다. 주위의 모과들은 철을 아는 듯 단풍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말라 바스러지고 젖은 것은 재색으로, 검은색으로 변하며 땅에 몸을 맡겼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하나의 삶의 과정입니다. 태어나면 언젠가 돌아갈 곳이 땅입니다. 다만 시간의 차이뿐입니다.
어제는 바깥으로 세 번이나 눈을 돌렸습니다. 모과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바닥에 떨어지면 줍고 싶었습니다. 며칠 전 개수를 세어보았습니다. 하나 모자라는 열 개입니다. 볼 때마다 세다 보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자리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떨어지면 주워서 거실에 놓을 생각입니다. 늦가을의 모과와는 달리 향이 미미합니다. 사과나 다른 과일의 향처럼 상큼하지는 않지만, 나는 듯 나지 않는 듯 마음을 모아야 냄새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보다는 은은한 것을 좋아합니다.
같은 모과이지만 가을에 떨어지는 것은 주울 생각이 없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꾸준히 보아야 눈에 익는다는 말처럼 모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움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겠지만 나만이 느끼는 것이니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검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지금도 저 나무에 씩씩하게 매달려있는 모과는 볼 때마다 색이 알게 모르게 변해왔습니다. 늦가을 햇살에 반짝이던 노란 열매가 영하의 강추위를 몇 차례 견디는 동안 피부가 동상에라도 걸린 듯합니다. 얼어버린 무를 보면 빨리 상하게 되는 것을 알기에 저 열매도 곧 상하겠지, 썩을 거라고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진노랑 색깔을 한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이미 함께 있던 나무 열매 하나가 꽃바구니 안에서 꽃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벽을 배경 삼아 탁자 한 곳을 차지했습니다. 꽃이 서서히 수명을 줄이면서 모과도 천천히 몸의 변화를 보입니다. 실내가 따스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얼었던 피부가 풀렸습니다. 짙었던 색이 엷어집니다. 대신 몸체의 부피가 줄면서 잔주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만져보았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의 딱딱함과는 달리 가벼우면서도 신축성을 보입니다. 바람기가 조금 부족한 배구공을 만지는 느낌입니다. 앞으로의 촉감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모과는 예전의 것과는 달리 외양이 고운 타원형으로 거부감이 덜합니다. 성형미인처럼 얼굴을 바꿨을까요. 품종개량이라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못생긴 게 모과지’ 열매 중에 못생긴 것의 대명사처럼 생각했습니다. 남보다 얼굴이 못났다는 것을 비꼴 때 호박과 모과를 불러오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어렸을 때 보던 모과의 기억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크고 울퉁불퉁했습니다. 맨 처음 찰흙으로 인형의 얼굴을 빚어놓은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친구가 귀한 사진이라며 메일을 보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의 사진부터 1970년대까지의 것들입니다. 세월의 변화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복장과 얼굴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눈으로 볼 때 그 세월 속의 일부를 살았으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가 있는 느낌이 듭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살아간다는 것, 어찌 보면 알게 모르게 기록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과나무 둥치에 어느새 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얼룩진 피부를 뚫고 연두색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무리 늦는다고 해도 잎망울이 눈을 뜰 때 모과는 가지를 떠날 것입니다. 아직은 끌어안은 나무와 매달린 열매가 세월의 흐름을 함께 견디고 있습니다. 끈끈한 정도 있겠지만 멋진 씨앗으로 남아 후대를 잘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지 스스로 단정 지어봅니다. 하늘을 올려보며 기다립니다. 봄을 기다립니다. 모과가 떨어지면 어미나무 옆에 정성껏 묻어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