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송도에 눈이 내리면 20240202
송도에는 눈다운 눈이 1월 한 차례 내린 후에는 이렇다 할 소식이 없습니다. 두 번인가 눈발이 보이기는 했지만, 하늘의 눈인지 땅에서는 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닥에 닿자마자 비처럼 땅을 짙게 물들이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내 고향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 쌓인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였지만, 더 내릴 기미가 보인답니다. 엊그제 모임에서 산촌에 사는 친구를 만났는데 산에 가는 일을 포기하고 집 안에만 머물렀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의 동향을 묻기에 요즘은 눈 구경 못 한다며 고향에 가자마자 눈 사진 한 장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운을 뗐습니다. 이제는 고향마을이 많이 변했지만, 향수를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고향의 겨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낱말을 늘어놓기도 전에 그 많은 추억이 줄을 지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뒤죽박죽 한꺼번에 쌓이다 보니 정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천히 줄을 세우는 동안 먼저 송도의 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송도, 내 고장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이 어느새 발길을 현관으로 인도합니다. 작은 우산을 꺼내 들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내 모습의 변화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와는 달리 눈을 맨몸으로 받으며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하지만 눈을 피할 생각은 없으면서도 우산을 받쳐 드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송도에서의 변화라면 비가 내려도 우산, 눈이 내려도 우산을 쓰는 일입니다.
이 겨울 송도에 눈다운 눈이 내리던 날입니다. 우산을 쓴 채 이리저리 쏘다녔습니다. 목적지도 없이 방향도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무심코 몸을 움직였습니다. ‘멍 때리기’를 했다고 하면 좋습니다. 점심 식사도 잊은 채 방황 아닌 방황을 했지만 저녁을 먹은 후에도 눈 쌓인 풍경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어둠과 함께 주변의 가로등을 비롯하여 보안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습니다. 건물들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낮의 눈 풍경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또 나가게요?”
“같이 나갈까요?”
아내는 밤길이 위험하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밤눈이 어둡다는 이유입니다.
천천히 가지 않은 곳을 향합니다. 이곳저곳 헤맸지만, 낮에 중앙공원을 빠뜨렸습니다. 밤의 야경이 좋은 곳입니다. 길을 건너 배 터로 향했습니다. 주변이 휘황찬란합니다. 높은 빌딩을 등에 진 호수는 그 많은 건물을 물속에 거꾸로 박고 불빛을 온전히 담았습니다. 겨울치고는 춥지 않은 날씨 탓인지 오색 전구를 매단 보트들이 호수에서 놀고 있습니다. 고니처럼 유유자적합니다.
눈길이 보트에 빼앗기는 동안 발길은 어느새 유엔광장의 다리 위에 멈췄습니다. 양옆을 봅니다. 저 멀리 왼쪽으로 아트센터가 보입니다. 큰 배를 닮은 트라이 볼이 보입니다. 앞으로 우뚝 솟은 건물이 보입니다. 뭔가 균형이 잡히지 않은 것처럼 불안해 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은 아파트가 균형을 잃고 곧 무너지지 않을지 하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고층 건물들의 불빛도 공원의 아름다움에 협조합니다. 이곳은 오늘따라 밤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홀로 걷는 사람, 삼삼오오, 한 무더기의 사람이 보입니다. 관광차 온 사람들입니다. 말씨와 모습에서 그들이 외국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스마트 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나는 한 옆으로 물러나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한 쌍의 남녀가 팔짱을 끼고 눈 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호수를 끼고 다리 밑 낭떠러지를 돌아갑니다. 갑자기 고향길이 떠오릅니다. 마을에서 학교에 이르는 길에는 산모퉁이가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내려다보면 사람이 숨바꼭질하듯 보이다 안 보이기를 몇 차례 이어집니다. 친구가 저만치 앞서가는 것이 보일 때면 함께 가고 싶은 마음에 달음박질합니다.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면 눈길에 몇 차례 넘어진 후에야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뭐야, 학교에 급한 일이라도 있니?”
숨을 몰아쉬는 나에게 친구는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손을 잡았습니다. 숨을 고르는 동안 잠시 말을 참았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모퉁이를 도는 남녀의 뒷모습을 몇 장 담아봅니다. 또 다른 한 쌍이 지나갑니다.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다시 스마트 폰을 들었습니다. 저 멀리 말소리까지 담아야 합니다. 눈발이 짙어집니다. 눈발이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밤 호수의 배는 목적지가 없나 봅니다. 달빛, 별빛, 불빛, 물빛을 모두 끌어안은 고니가 되었습니다. 서서히 고향의 눈과 송도의 눈이 겹칩니다. 쉽게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가 어려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