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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입춘의 눈치 20240205

by 지금은

입춘이 어제인데 폭설이 웬 말입니까. 겨울 날씨치고는 어제의 기온은 예년에 비해 매우 높았습니다. 올해의 입춘 관측 사상 51년 만의 최고 기온이랍니다. 놀이공원에는 반소매 차림의 어린이가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공놀이에서 봄이 성큼 다가옴을 느낍니다.

아침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유리문에 빗방울이 올챙이처럼 옹기종기 모이는 듯했는데 쪼르쪼르 쪼르르 미끄럼을 탑니다. 빗방울이 점차 굵어집니다. 뉴스를 들으니 오늘내일 폭설이 예상된답니다. 강원도와 전라도 지방은 이미 폭설을 예상하는 습한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기상 예보관이 주의 사항도 함께 전합니다. 미끄러울 수 있으니 길조심 하라는 당부입니다.

입춘이 지났는데 눈 조심이라니, 절기상으로는 봄의 문턱이지만 계절로는 아직 겨울입니다. 봄을 알리는 봄꽃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리기는 해도 3월은 돼야 봄의 맛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서 봄이 오고 있는 징조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귀로, 손으로 느낍니다. 공원을 산책합니다. 연못가의 버드나무가 연둣빛을 내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수양버들 옆에 있는 버들강아지가 솜털을 마냥 부풀렸습니다. 목련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만지면 곧 터질 것만 같습니다. 밤새 내린 비에 물의 양이 늘었기 때문일까요. 공원의 오솔길 옆입니다. 빗물 관을 타고 땅 아래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초가집 추녀의 고드름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를 연상합니다. 깊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의 울림이 공명을 일으킵니다.


잠시 후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말 그대로 강원도와 전라도는 새하얀 세상이 되었습니다. 중장비를 이용하여 찻길의 눈을 치우는 모습이 보입니다. 집 앞과 골목길의 눈을 치우는 눈삽도 보입니다. 비닐하우스의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라고 합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의 무게가 시설물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남쪽 지방보다 우리 고장에 봄이 먼저 오는 게 아니야 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늘 봄소식은 남쪽에서부터 들려옵니다. 올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12월에 제주도에 매화가 피었습니다. 이상기후의 현상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1월 말이나 2월 초는 되어야 하는데 상상 이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소식이 전해지고 며칠 후 기온이 급강하했습니다. 눈이 쌓여 상고대를 이루었습니다. 괜한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 매화는 그 추운 날씨에 눈 속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이어지는 뒷얘기가 없으니 궁금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 얼어 죽었다는 말이 있듯이 날씨란 식물도 예측하기가 곤란해 보입니다. 안다면 미리 꽃망울을 터뜨렸겠습니까. 개중에는 가끔 개나리나 영산홍도 이런 현상을 보였습니다. 생각 외로 너무 이르다든가 너무 늦을 때입니다. 사람에게 쓰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부지란 말이 식물에도 통하지 않을까 합니다.


봄은 그렇게 철부지를 놀리 듯 놀리 듯하며 오곤 합니다. 얼굴을 감추고 얼굴을 내밀기를 반복합니다. 아이의 웃음처럼 까르르 웃다가도 젖먹이처럼 칭얼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봄은 제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연약해 보이지만 연둣빛 무기를 들었습니다. 서서히 잎을 깨우고 보이지 않는 꽃망울을 부풀립니다. 아무리 짓궂다고 해도 4월이 되면 제자리에 팔을 벌린 채 변함없이 제자리에 우뚝 섭니다.


빨간 우산을 쓴 사람이 집 앞을 걸어갑니다. 걸음걸이가 성급해 보입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을까. 아니 봄을 맞을 요량으로 봄비와 함께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연두색 우산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빨강보다는 봄이 오는 길목에 어울릴 것만 같습니다. 겨우내 푸름을 간직한 사철나무가 빗물을 머금고 싱싱함을 뽐냅니다. 옆에는 봄을 먼저 보려는 듯 한껏 몸을 길게 세운 대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서있습니다. 이 겨울을 잘 견디어냈지, 자랑이라도 할 것만 같습니다. 주위의 나무들은 이 추위를 어떻게 견뎌볼까 하고 늦가을에 단풍잎을 모두 떨어뜨렸는데, 세월은 화살 같은 거야 하는 마음으로 화살나무가 나를 맞이합니다. 이 나무는 어느 나무보다도 메말라 보이는 앙상한 줄기로 겨울을 버티면서도 잎망울을 깨알만큼 품어 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말은 없어도 동물이나 식물 모두가 봄을 기다리는 눈치임에 틀림없습니다.

눈썰매를 타고 싶어 겨울을 기다렸던 철부지도 어느새 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방 안에 갇혀 지낸 날들이 답답합니다. 어서 빨리 놀이터를 달려야 합니다. 봄은 천방지축 날뛰는 겨울을 달래며 철부지를 앞세우고 옵니다. 들쑥날쑥 봄 날씨 같다는 말이 생각나는 시기가 당분간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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