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안개의 하루 20240219
안개가 창문을 가렸습니다. 맑은 유리창이 하얀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위를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어제 내린 비가 영상의 기온에 잡히고 말았나 봅니다.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허공에 갇혔습니다. ‘안개’ 안개는 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김처럼 뿌옇게 떠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날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자주 써먹던 수수께끼입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늘만큼이나 안개가 자욱한 날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개가 뭐야?”
“명수네 개지.”
잠시 머뭇거리던 친구가 동네에서 덩치가 제일 큰 개를 짚었습니다. 고개를 젓자 반문했습니다. 답을 말하니 뭔가 신기한 물건이라도 찾아낸 듯 입술을 방긋하더니 곧 학교를 향해 줄달음질을 쳤습니다. 함께 가자고 외치며 따라갔지만 소용없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갯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빠른 발입니다. 달리기가 느린 나는 어쩔 수 없이 숨을 헐떡이며 속도를 늦추고 말았습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다른 친구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다가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개가 뭐지?”
“안개.”
허망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에 ‘그냥’이라고 답했습니다. 교실은 잠시 소란스러웠습니다. 내 뒤를 이어 오는 친구마다 다른 친구들이 물어보기에 바빴습니다.
나는 안개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몸이며 옷이 눅눅한 느낌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새벽에 안개가 끼면 머리가 벗어지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안개가 걷히면 강한 햇살이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는 말처럼 어른들의 삶 속에는 경험의 지혜가 숨어있습니다.
짙고 짙은 안개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산촌에서의 안개, 섬에서의 안개, 도시에서의 안개입니다. 안개라고 해서 성질이 각기 다른 것은 아닙니다. 짙고 옅음입니다. 또 환경에 따라 보고 느끼는 차이입니다. ‘차 조심 길 조심’ 눈비가 많이 내린 날처럼 안개가 심한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밤에 피라미드를 보았습니다. 가로등 밑으로 삼각형 모습이 옅게 그려집니다. 중학교 때입니다. 안개가 짙어 길가의 가로등이 보이지 않는 날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가로등이 많지 않고 밝지도 못했습니다. 전봇대 가까이 다가가야만 비로소 보입니다. 골목길을 걷는 동안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합니다. 섬뜩한 기분이 듭니다. 이런 날은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비처럼 옷까지 젖으니, 마음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처럼 서서히 젖어듭니다. 차라리 비였으면 당연하다고 여길만한데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섬의 안개는 무섭습니다. 모든 것을 일시에 묶어 놓습니다. 도시의 안개와는 달리 다가오는 속도가 빠릅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섬을 집어삼킵니다. 바다에 삶을 맡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다에 묶인 배, 갯벌에 갇힌 일손, 까막눈이고 어둠입니다. 이런 날은 섬의 두려움입니다. 용왕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군요. 그 옛날부터 안개와 폭풍, 파도를 다스리는 용왕을 잘 모셔야 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꽹과리가 있습니다. 집에 온 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손에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가끔 물건을 정리하면서 먼지를 닦아내는 정도입니다. 아내가 손에 든 것을 보고 언젠가 말했습니다.
“쓰지도 않는 것, 누구에게 주든가 버리든가.”
하지만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섬에서 사람을 살린 물건입니다. 짙은 갯벌의 안갯속에 갇힌 어민을 해안으로 이끌었습니다. 소리가 사람을 불렀습니다.
오늘은 아직 겨울의 끝자락인데 안개가 자욱합니다. 여름에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어느 강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꽃을 만들었습니다. 송아지의 콧김이 생각납니다. 매섭게 추운 날입니다. 송아지의 코에서 뿜어대는 김이 코 주변에 서려 서리꽃을 피웠습니다.
안개 짙은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은 어떨까요.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지금도 쓸쓸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