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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 시샘 20240222

by 지금은

진눈깨비가 내리던 어젯밤,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어 길을 나섰습니다. 우산을 들었습니다. 비도 눈도 아닌 게 딛는 발을 질퍽거리게 합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건널목의 신호등을 기다리고, 길을 건너는 동안 앞자락에 물방울이 맺혔습니다. 바람 탓입니다. 우산을 썼지만, 날리는 진눈깨비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손으로 툭툭 털어봅니다. 생각처럼 달아나지 않고 짙은 얼룩을 남깁니다. 손에 찬 기운이 느껴집니다. 밖에서 돌아온 아내가 추울 거라며 두꺼운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올겨울에는 그만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던 파카를 꺼냈습니다. 털조끼도 속에 받쳐 입었습니다. 목도리도 했습니다.


바닥이 미끄럽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천천히 옮깁니다. 이제는 진눈깨비가 그만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글피부터 날씨가 흐리더니만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저께, 어제까지 이어집니다. 일기예보를 보았습니다. 일주일 내내 좋지 않은 날씨입니다. 절기로 보아 우수(雨水)가 아니랄까 봐 티를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수, 경칩(驚蟄)에 대동강 얼음이 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수는 24 절기 중 하나로 매년 2월 19일이나 20일입니다. 영어로는 Rain Water라고 하며, 빗물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날은 겨울 추위가 풀리고 눈과 얼음, 서리가 녹아 빗물이 되고 한파와 냉기가 점차 사라지며 봄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는 날입니다. 입춘과 더불어 겨울의 마무리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한 친구가 우수와 관련된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절기에 대한 지식이 해박(該博)합니다. 시골에 살기도 하지만 어릴 때부터 농사에 관한 이야기를 동네 어른들한테서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기억력이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수에 관련된 속담과 민담이 있습니다.


우수에 비가 내리면 봄비가 많이 온다.


우수에 바람이 많이 불면 봄이 빨리 온다.


우수에 구름이 많으면 봄이 쾌청하다.


우수에 눈이 오면 봄이 늦어진다.


앞의 말을 들춰봅니다. 올해는 비가 많이 오겠지요. 우리 인천에도 봄이 빨리 올까요? 갑작스러운 폭우로 제주도와 전라도 지방에는 뜻하지 않은 수해를 겪었습니다. 시설물의 피해는 물론 사망자까지 생겼습니다. 강원도 지방에는 뜻하지 않은 폭설이 쌓였습니다. 눈이 오면 봄이 늦어진다는데 강원도의 봄은 예년에 비해 늦어질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보통 때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젖은 찻길은 더 짙은 검은색을 보입니다. 가로등에 비치는 바닥이 유난히 반짝이입니다. 달리는 차의 불빛과 가로등의 불빛이 섞이며 자연스레 명암을 나타냅니다. 같은 장소라도 자동차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가로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잎이 없는 나무는 가는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우기도 하고 감추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게으른 술래잡기를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내가 가로등 밑을 지날 때입니다. 하나만을 보이던 내 그림자가 갑자기 두 개가 되었습니다. 나의 분신은 없는데 똑같은 그림자가 나무의 큰 가지처럼 갈라졌습니다. 바닥은 하나입니다. 내가 딛고 있는 발을 중심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 놓인 내 발을 기준으로 내 몸에서 태어난 두 개의 그림자가 좁은 바닥을 함께 딛고 있습니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가로등을 살핍니다. 가까운 자리에 서로 이웃하는 가로등이 만들어낸 효과입니다. 불빛마다 나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그림자를 만들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는 짙고 하나는 다소 옅은 무채색입니다.


내 몸은 가로등에 비춰 반짝이고 있는데 그림자는 흐릿한 어둠뿐입니다. 오히려 빗물에 반사되는 바닥의 반짝임까지 그림자가 덮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허상이다.’ 부조(浮彫)의 허상입니다. 잠시 멈춰 그림자놀이를 했습니다. 가로등에서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아니 등 밑으로 숨어들기도 했습니다. 뒷걸음질을 치자 그림자도 뒤로 물러납니다. 두 개의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옅어집니다. 조금 더 발걸음을 떼자, 그림자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어릴 때 마당에서 하던 그림자놀이가 생각납니다. 아침의 그림자, 한낮의 그림자, 저녁의 그림자, 달밤의 그림자 그 특징이 있고 제각각입니다. 단지 같은 점이 있다면 부조이고 빛이 없다는 점입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가 말합니다.


“비가 많이 오는데 왜 이렇게 늦었어요?”


“진눈깨비와 놀다 오는 중이에요.”


젖은 우산 젖은 옷을 펼칩니다. 따스한 온기가 몸을 감쌉니다. 봄이 방 안에서 제 홀로 놀고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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