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수요일 아침 20240221
한없이 길어질 것만 같은 밤이 어느 날부터 다시 조금씩 낮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고통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 줄어드는 느낌이 듭니다. 내려놓을 마음이 들고 그 안에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 어느 때는 짧게만 느껴지는 순간을 지나치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코로나 같이 전 세계의 사람이 함께 겪는 고통, 개개인의 가슴 아린 고통마저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유럽이 페스트만큼이나 맹위를 떨치며 곧 인류의 멸망을 불러올 것만 같던 코로나도 인간의 강인함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언젠가는 이겨내겠지 하는 기대가, 지나고 보니 옳은 생각이었습니다. 누구엔 가는 지금이 화창한 대낮이요, 또 다른 누군가에는 주위를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이라고 해도, 시간이 지고 계절이 변하고 해가 바뀌며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우리 고장에는 어제오늘은 계속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원도는 깊은 밤에 빠진 것처럼 폭설이 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겨울과 봄이 혼재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봄과 겨울이 서로 이웃을 넘보며 힘겨루기를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며칠 전 만 해도 혹독했던 겨울이 바짓가랑이에 엉기는 가느다란 안개비에 자리를 내어 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은 이듬해 풍년을 가져온다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베란다에서 힘없이 나날을 견디는 화분을 모처럼 밖에 내놓았습니다. 모과나무 밑입니다. 잘 자라라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보살펴보지만, 모든 생물은 하늘의 손길만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궁금한 마음에 아침 일찍 나무 밑으로 갔습니다. 흠뻑 빗물을 뒤집어쓴 잎줄기가 생기를 얻은 듯 반짝입니다. 윤이 납니다. 사철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나무의 정기를 얻었는지 모릅니다. 메말라 보이던 줄기와 가지가 푸른 기운을 보입니다. 다른 모과나무와는 달리 겨우내 아홉 개의 모과를 가지에 매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이니 신기하다는 생각입니다.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는 동안 모과의 거죽은 노란빛에서 갈색으로 변했습니다. 언제까지 허공에 매달려 있을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눈발이 비친 후로는 매일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늘 아홉 개입니다. 아침에 보아도 저녁에 보아도 변함이 없습니다. 달이 밝은 한밤중에도 보았습니다. 새해가 바뀌고 정월이 지났습니다. 끈질긴 인연입니다. 이제는 바라보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더니만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며칠 동안 마음속에서 잊고 있었는데 어제 지나치듯 나무를 보았습니다. 허전한 기분이 듭니다. 가렸던 우산을 옆으로 돌렸습니다. 다섯 개입니다.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네 개가 사라졌습니다. 궁금해서 바닥을 내려다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떨어진 게 어디로 갔을까. 내가 잘못 센 것도 아닌데, 봄이 데려갔는지 모릅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모과나무와 열매의 이별이 이처럼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다섯 개의 모과도 내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봄의 곁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내일이면 멈출 것입니다. 늦어도 모래 느긋하게 어림잡아 글피쯤은 태양이 얼굴을 드러낼 것입니다. 여름부터 봄을 준비하던 목련은 꽃망울을 통통 불려 갑니다. 함박웃음이라도 터뜨릴 듯 양 볼이 메추리알만큼 볼록해졌습니다. 누군가 톡 건드린다면 참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목젖이라도 내보일 태세입니다. 수양버들의 줄기는 초록으로 물들이며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버들강아지는 하얀 솜털 사이로 노란 술을 내보입니다. 저녁이 있는 것은 아침 때문입니다. 꽃소식이 들려옵니다. 머지않아 우리 고장에도 꽃들이 아리따운 여인의 뺨처럼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아직도 비가 내립니다. 나뭇가지의 꽃망울, 잎망울에는 투명한 구슬처럼 빗방울이 엉겨 붙었습니다. 바람이 서서히 다가옵니다. 봄바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빗방울이 똑 꽃망울을 떠났습니다. 날이 개면 곧 가벼운 마음으로 햇살을 받으며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모든 생물의 삶이 평지풍파를 거치며 세월의 무게를 견디듯 우리네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다림입니다. 만질 수 없는 꿈이라고 해도 희망을 꿈꾸기에 여기에 있습니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