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눈꽃 핀 마을 20240222
눈을 뜨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나.’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눈앞의 정경이 말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모든 게 낯섭니다. 모두가 흰색, 나머지 색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흰색의 짙고 옅음뿐이지 신세계입니다. 내 건물에서 저 멀리까지 내려다보이는 바깥 풍경은 온통 겨울입니다. 급히 아내를 불렀습니다.
“저기 좀 봐요. 눈꽃이 만발했네. 벚꽃 만개한 날보다 더 화려하구먼.”
일찍 아침을 준비하던 아내가 창가로 다가왔습니다. 옆에서 바깥을 구경하나 했는데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몸을 돌려 주방을 보니 없습니다. 잠시 후 끝 방에서 나왔습니다. 나도 슬며시 끝 방으로 갔습니다. 다시 밖을 내다봅니다. 거실에서 보는 풍경과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저 멀리 인천대교의 난간이 흰 띠를 둘렀습니다. 물길을 따라 길게 펼쳐진 둔치도 흰색입니다.
아침을 먹자마자 일어섰습니다. 아내는 눈치를 챈 듯 두꺼운 옷을 챙깁니다. 입춘 무렵입니다. 봄이 온다고 얇은 옷을 입고 외출했다가 싸늘한 기운에 이불을 뒤집어쓴 일이 있습니다. 바깥을 보니 눈이 쌓였어도 마음에는 활짝 핀 목화송이의 포근함이 느껴집니다. 얇은 옷을 입어도 되겠다는 마음이지만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목도리를 하고 모자를 썼습니다. 장갑도 끼라고 했지만, 이것만은 거절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불편하다는 이유입니다. 밖으로 나왔습니다. 눈의 포근함보다는 먼저 손의 차가움이 다가옵니다. 슬며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습니다. 넘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어젯밤에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입니다. 비가 내리더니만 진눈깨비로 변했습니다. 봄비치 고는 양이 많습니다. 이틀이나 쉼 없이 내렸습니다. 진눈깨비로 변하면서 더욱 기세가 강해졌습니다. 강원도에는 며칠 전부터 대설주의보가 내렸습니다. 몇몇 곳은 무려 70센티나 쌓였답니다. 기자가 눈에 갇힌 오지 마을을 소개합니다. 모두 눈길을 치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중부지방은 저녁부터 비가 진눈깨비로 변했습니다. 역 입구에는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여러 명이 발길을 멈춘 채 하늘을 올려보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거리낌 없이 역사를 빠져나와 우산을 받쳐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내 주위를 뒤덮은 비와 눈이 불빛의 정도에 따라 아름다움을 연출합니다. 가로등, 신호등, 건물에서 쏟아내는 빛에 따라 내 눈에 비치는 모습은 각양각색입니다. 물뿌리개에서 흩어지는 가는 물방울처럼, 굵은 체에서 빠져나오는 가루처럼, 때로는 빗방울이, 때로는 눈이 하늘을 온통 채웠습니다. 하지만 내리는 진눈깨비는 땅에 닿는 순간 물로 변했습니다. 바닥이 질척거릴 뿐 눈은 밟히지 않았습니다. 대설주의보를 발령했지만 지금 같아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입니다. 아파트단지의 길이 평소에 비해 좁아지기는 했어도 어느새 눈이 치워졌습니다. 성미 급한 아비가 아이를 눈썰매에 태우고 놀이터 옆을 지나칩니다. 조금 큰 아이가 뒤를 따라 달립니다. 형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꼬마의 등 뒤가 텅 빈 것을 보는 순간 함께 태워도 되겠다 싶습니다. 우수가 지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 많은 눈이 내렸는지 모릅니다. 소한도 대한도 평년에 비해 포근했습니다. 대신 그 사이에 한파가 몰려오긴 했지만, 어느새 봄이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우수의 절기는 더 따뜻했는데 모르는 게 날씨라는 생각이 듭니다. 올겨울에 눈이 몇 차례 내렸지만, 오늘처럼 많은 눈을 본 것은 몇 년 만의 일입니다. 어릴 때의 고향, 한겨울에는 눈도 많이 쌓였는데, 친구들의 소식을 들으면 아직도 눈이 많이 쌓인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끼고 높은 산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향해 가기에는 발걸음으로는 멀지만, 요즘의 발달한 대중교통으로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고라니가 먹을 게 없어 민가까지 내려와 소의 먹이를 엿보았다고 합니다. 착한 친구입니다. 농사철 작물을 해치는 것을 생각하면 밉기도 하지만 모르는 척했다지요.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오늘은 산책보다 사진을 남기기 위해 공원을 돌아다녔다는 말이 더 합당할 것 같습니다. 눈 풍경에 욕심이 생겼을까요? 여기저기 찍고 싶은 게 널렸습니다. 눈이 눈을 떠나지 않습니다. 동영상을 남길까 했지만, 왠지 낱장의 풍경이 더 좋겠다 싶었습니다. 마음껏 사진을 찍고 돌아올 때입니다. 한적한 곳에 이르렀을 때 초등학생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두 형제를 보았습니다.
“눈사람을 찍어도 될까?”
네 하는 짧은 대답을 내놓고 눈을 뭉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느새 눈사람이 다섯이나 우뚝 서있습니다. 크고 작고, 뚱뚱하고 홀쭉합니다. 형제는 각기 눈사람의 몸을 다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찰흙으로 인형을 만들 때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옆에 빨간 눈썰매가 보입니다. 나는 동생에게 언덕에서 썰매 타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 요구대로 가파른 언덕에서 타는 모습을 연출해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눈사람, 눈썰매 풍경을 담았습니다. 앞으로 만들 그림책을 생각합니다. 외진 곳에 만든 눈사람, 오래가기를 기대합니다. 눈 오리까지 사진에 담았으면 좋으련만…….
큰길로 나왔습니다. 눈꽃을 떼어놓고 집으로 향하면서 바지를 털었습니다. 신발을 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