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오늘 그리고 오늘 20240223
오늘은 겨울의 끝자락, 봄의 초입, 둘 다 맞는 말입니다.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지났습니다. 정월 대보름이 낼모레입니다. 봄이 오는 듯 매화의 꽃망울이 팥알만큼, 아니 작은 콩알만큼 부풀어 오르기도 했는데 겨울은 시샘이라도 하듯 밤새 눈송이가 꽃망울을 움켜잡았습니다. 먼 산에 푸른 기운이 보여 봄이 눈을 뜨고 있다고 식구들에게 시력을 자랑했는데 멋쩍게 되었습니다. 밤사이 산은 물론 시야에 보이는 게 모두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겨울이 발걸음을 크게 내디뎠습니다. 봄이 별거야 하는 투입니다.
‘벚꽃이 온 산야를 물들인다 해도 겨울 꽃눈만 하겠어.’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른나무와 마른풀에도 흰 꽃을 피웠습니다. 산에도 들어도 도시에도 가리지 않고 뻥튀기를 쌓아놓듯 눈을 퍼부었습니다. 매화나무에는 작은 매화 송이가, 목련 나무에는 큼직한 목련 덩이가 동글동글 매달렸습니다. 겨울은 눈을 사랑합니다. 봄이 비를 몰고 왔는데 어찌나 싸움이 치열했는지 모릅니다. 온종일 밀고 당기기를 했습니다. 비가 눈으로 눈이 비로 바뀌기를 여러 차례입니다. 저녁이 되자 힘이 빠졌는지 비도 눈도 아닌 진눈깨비를 만들어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봄이 양보했는지 아니면 겨울이 우격다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박눈을 만들어냈습니다. 아침입니다. 질척거리던 길이 얼어붙은 채 눈을 끌어안고 여기저기 꽃을 피웠습니다. 앞산은 선비들이 좋아하는 산수화가 되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희미한 산의 윤곽이 어울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명화를 탄생시켰습니다.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선비가 루(樓)에 올라 산수를 구경하다 아름다움에 시 한 수를 짓고 싶었는데 그만 마음을 접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할 수 없어 점 하나 찍고 말았다니 마음에 와닿는 순간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잠시 감탄을 쏟아낸 것뿐입니다.
오늘은 봄이 힘을 내는가 봅니다. 승리에 취해있는 겨울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는 게 아닐까. 일어나서 길을 떠나야 하는 게 아니겠나 하고 어르는 모습입니다. 아침 일찍 햇살을 불러들였습니다. 흰 물감을 서서히 지우고 있습니다. ‘툭툭’하고 나뭇가지에 피어있던 눈꽃이 아래로 곤두박질합니다. 아파트의 벽에 붙어있던 눈과 얼음 조각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철퍽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산산조각으로 흩어집니다. 봄의 성깔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눈은 아예 무시하고 얼음까지도 사정없이 녹이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에게 이제 추위랑은 걱정하지 말라는 투입니다. 수양버들이 연못에 다시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바람에 따라 슬렁슬렁 머릿결을 물에 담글 듯 수면 가까이 일렁입니다. 청둥오리의 병아리가 그림자 속을 들락거리며 숨바꼭질합니다. 팔뚝만 한 잉어가 병아리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그림자를 뚫고 지나갑니다. 병아리들이 제물에 놀랐을까요. 물속에서 숨바꼭질하더니만 어느새 연못을 가로질러 갑니다. 물결도 뒤를 따라갑니다.
어제 본 눈사람이 걱정됩니다. 눈 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나무 숲으로 갔습니다. 누런 잎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들이 눈사람을 감싸고 있습니다. 어제 두 형제가 열심히 만든 눈사람입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가가 상태를 확인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 어제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형제는 눈사람이 오래 서있기를 바랐는지 모릅니다. 그 넓은 마당을 두고 한적한 곳으로 장소를 정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옆에서 바라보는 눈 오리도 좌우로 정렬하고 눈사람을 뒤로한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들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보아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아직 준비하지 못한 삶의 끝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참나무의 잎들이 바르르 떨면서도 곁을 감싸고 있습니다. 말하지는 않아도 누군가의 보호가 되고 바람막이가 된다는 게 좋다고 느껴집니다. 눈사람이나 눈 오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삶이 그러합니다. 눈사람과 눈 오리는 겨울이 머물기를 바라고 나무와 풀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계절의 가운데 서서 지금, 이 순간 어느 쪽일까를 생각합니다. 떠나는 겨울이 아쉽고 다가오는 봄도 반갑습니다. 이별의 아쉬움과 만남의 반가움이 서로 나를 잡아끄는 순간입니다. 갑자기 겨울을 놓아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다가서야 할 때와 떠날 때를 알아야 합니다. 너무 빠르면 시샘을 받고 너무 느리면 원망이 됩니다. 나는 조금 천천히 조금 천천히, 나는 조금만 빨리 조금만 빨리하면서 양팔을 좌우로 흔들고 있습니다. 그게 내 마음과 같은 요즘 날씨가 아닐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