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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Jul 11. 2020

신혼집 구하기 - 탐색

선택의 여지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고민해야 할 대상도 많다는 것이다. 신혼집을 구하는 데 있어 '꼭 이 동네여야만 해'라든지, '아파트여야만 해'라든지 이런 조건이 없었던 우리는, 오히려 처음에 망망대해에서 갈 길을 잃었다. 서울 서쪽이면 어디든 괜찮았으니, 여기도 좋은 것 같고, 저기도 괜찮은 것 같고. 알아볼수록 고민거리만 늘어갔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시간이 많다는 것은 그 시간만큼 '고민'한다는 뜻이다. 시간이 많다고, 더 많은 것을 알아본다고, 더 나은 결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차라리 빨리 결정하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그리고 두 명의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의 첫 번째 고비는 신혼집을 알아보다가 왔다.






C는 5살 때 이사 온 집에서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어머님, 아버님은 지금도 살고 계신다.) 이사 경험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기준으로 집을 알아보는 것이 좋은지, 내가 살 동네를 알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몰랐다. 내 선택으로 내 삶의 모든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머리로는 신혼집을 찾아봐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가능한 미뤄두려고 했던 것 같다. 아직도 시간은 많았으니까.)


나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하고 살았다. 보살핌 많던 부모님의 손길 아래에서 벗어나, 자취방을 알아보는 것부터 계약, 이사까지 모든 것을 알아서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기숙사에서 살았지만, 2학년 때는 기숙사에서 떨어지면서 자취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구한 방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관리비 3만 원)의 실평수 3평 남짓한 방이었다. 북향의 코딱지만 한 방에서 2년을 살았다.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가기 전, 계약 기간이 애매할 때는 친구 집에서 보름을 얹혀 지내다가, 한 학기 하숙을 살았고(이때 짐 나르기를 C가 도와줬다.), 교환학생 가서는 유럽에서 6개월을 있었다. 그리고 귀국할 때 얻은 방에서, 2009년부터 결혼할 때까지 살았다. 파란만장한 이사 생활이었다.(하나하나 에피소드로 글 한 편씩은 쓸 수 있다.) 마지막 집에서는 꽤 오래 살았는데, 그곳에서 대학생-대학원생-회사원이 되었다. 


서울에서 오랜 시간을 살기는 했지만, 내가 이 동네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따라 얼마든지 터전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전에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이라고. 이제 결혼을 하면서 자리를 잡게 될 곳이 진짜 '내 집'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더 빨리, 더 열심히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구글 검색 - 한경닷컴



C는 인천 부평에서 살면서 김포공항으로 출근하였고, 나는 연희동에서 살면서 광화문으로 출근하였다. 우리는 결혼하면서 어디에 살든 둘 중 한 사람은(혹은 둘 다) 출퇴근 거리가 늘어날 터였다. 후보지는 참 많았다. 김포공항 및 강서구부터, 북쪽으로는 서대문, 은평, 남쪽으로는 영등포, 구로 언저리까지. 그 정도가 출퇴근이 감당되는 곳이라고 보았다.(김포공항보다 더 서쪽이거나, 광화문보다 더 동쪽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 같이 부동산 앱을 켜고 지도를 보면서 시세를 관찰했다. 이 동네는 생각보다 지하철이 너무 멀고, 저 동네는 주변에 공업단지가 있고,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는 곳들의 아파트는 연식이 오래됐는데도 비싸고 등등등. 가격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제각각의 요인으로 다르게 반영되어 있었고, 단순히 앱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그 뜻을 잘 몰랐다. 


부동산 앱은 그저 무미건조하게 숫자를 알려줄 뿐이었는데, 그게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돈이라고 생각하니 막막하게 느껴졌다. 일단 회사 사람들이 신혼집을 꾸렸다는 동네를 보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매우 비쌌다. 당산, 애오개, 공덕 근처는 패스. 그 주변으로 넓혀 영등포, 문래를 보는데 거기도 생각보다 비싸구나 싶었다. 김포공항 근처나 구로 쪽은 나름 저렴했지만 너무 낯선 동네라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보면 볼수록 머릿속에는 혼란이 왔다. 우선순위 없이 정보들이 마구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C에게 어디가 좋을지, 어떤 점을 먼저 고려하는 게 좋을지 의견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시세도 모르고, 동네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예를 들어 '가양 어때' 하고 물으면, '김포공항까지 9호선 가니까 좋지.', '방화는 어떨까' 하고 물으면, '나야 회사 가까우니 좋지'하는 식이었다. 둘 다 살아본 적 없는 모르는 동네이니, 한 번 동네 구경 가볼까라든지 거기 사는 회사 사람한테 동네 물어봐볼까 등의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다. 부동산은 지도에서 보는 거랑, 실제 동네를 가보는 것이랑 그렇게 다르다고 말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015년 초여름, 나의 스트레스와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 갔다.






8월 중순쯤 어느 날, 나는 배탈과 고열로 혼자 새벽 4시에 응급실에 들어가 그대로 입원을 하였다. 장염이었다. 설사가 멎을 때까지 3일을 굶어야 했고, 3일 동안은 열과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꼬박 5일을 입원하고, 죽을 먹을 수 있게 되고 나서야 퇴원했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내 업무에 추가로 2명의 업무를 대무하고 있었고, 한창 결혼 준비 중이었으며,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해 주제를 정리하고 있었다. 8월 초에 막 상견례를 했고, 결혼식장 탐색은 막바지였다. 이제 남은 것은 신혼집. 결혼식은 내년이므로 벌써 집을 계약하기에는 이르지만, 우리는 아직 동네도 정하지 않았으므로 미리미리 살 곳을 고민해야 했다. 바쁜 일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시기였다.


일단 동네를 정해야 그 안에서 집을 알아보는데 C는 도통 고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셋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던, 그런 때였는데 그는 아무런 의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나랑 '진지하게' 결혼할 의지는 있냐고 외치기도 했었다. 그는 결혼식장 알아보기, 데이트 스냅 찍기 같은 이런 즐거운 것 말고, 우리가 살 집 구하기, 돈 구하기 같은 정말 현실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스트레스가 가득한 상황 아래서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C는 충격을 먹은 것 같았다. 퇴근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걱정 가득한 얼굴을 내비쳤다. 울산에서 엄마도 바로 올라오셨고, 어머님도 오셨다. 그야말로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당시 나는 정말 너무 아팠고, 낮이고 밤이고 낑낑대며 있었고, 입원할 당시만 해도 언제 퇴원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C는 안 그래도 내가 할 일 많고 힘든 상황에서, 본인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며 그동안의 무관심에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퇴원을 하자, 우리 C가 달라졌다. 결혼에 대해, 우리가 같이 가꾸어 갈 삶의 모습에 대해 한층 더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지지부진 결정이 나지 않았던 것이 빠르게 해결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매주 '동네 탐방' 데이트를 시작했다. 관심이 간다 싶으면 이 동네, 저 동네 가리지 않고 일단 차로 한 바퀴 돌고, 걸어 다녔다. 그리고 집을 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우선순위를 정했다. 결혼식장을 정할 때처럼, 집에도 필요했는데, 이제야 수많은 조건들 중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손에 꼽은 것이다.  


 출퇴근이 편리해야 할 것 (5호선, 9호선, 공항철도 기준)

 햇빛이 잘 들 것 (남향 중심)

 맞바람이 드는 구조 (아파트로 치면 판상형)

 주차가 편리해야 할 것 (이중주차 X)


이 기준에서 빌라든, 아파트든 관계없었다. 사실 이 기준들은 모두 내가 전에 살았던 원룸 기준으로 부족한 것들이었다. 남향이지만, 짐이 너무 많아 창문을 다 가렸고, 창문이 하나뿐이라 공기 순환이 잘 되지 않아 매우 더웠다. 그곳에서 나 혼자 힘들게 사느라 건강이 약해졌다고 생각한 C는, 내 건강을 최우선으로 신혼집의 방향을 잡았다. 뿐만 아니라 원룸에서 이중주차의 어려움을 경험했기에, 이것만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하주차장에서 지상까지 한 번에 연결되는 엘리베이터 같은 건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 수 없지만, 이중주차를 해야 하는 환경은 꼭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네이버 부동산을 기본으로 사용하며 탐색했다. ⓒ구글 검색-매일경제



그렇게 우리는, 부동산 앱을 보며 성산동을 누볐고, 동교동 골목을 돌아다니고, 망원동의 주택가와 나 홀로 아파트를 보면서 선호하는 동네의 모습을 가상 속에 그려나갔다. 그동안은 연남, 홍대 놀러 다니면서 지나던 길을, 우리가 여기에 산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되었다. 한동안은 단독주택에 꽂혀, 저렴하게 매물이 나온 효창공원 쪽까지도 알아보러 갔었더랬다.(생각보다 언덕이 심하고 골목이 좁아서 바로 포기했다. 이래서 직접 가봐야 한다.) 하나하나 함께 동네를 다니며 의견을 주고받다 보니 점점 생각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C는 혼자 DMC역 근처, 비싸디 비싼 상암 쪽이 아닌 아직은 개발 중이었던 북가좌동 쪽으로 혼자 동네 구경을 하러 갔다.(아마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을 부동산 용어로는 '임장'이라고 하는 것 같다.) 


원래도 워낙 오래된 동네였고, 안쪽의 가재울 뉴타운 구역은 한창 재개발이 진행 중이었는데, 덕분에 역 근처에 나 홀로 아파트들의 가격이 꽤나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서울 서쪽 끄트머리라고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신촌 생활권과 가까웠고, 공항철도가 지나는 DMC 역이 있어 공항까지 출퇴근이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면 광화문도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둘 근무지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 동네는 어떨까 하고 있던 와중에, 평일이라 C가 혼자 먼저 다녀와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C의 마음에 쏙 드는 곳을 발견했다.






신혼집은 신혼부부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그렇기에 둘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 누가 알아봤든, 누가 돈을 더 부담했든, 결국 그곳에서 사는 사람은 부부이기에 이것에 대해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물론 간단하게 끝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미 살고 있는 곳에 들어가 살림을 합치기로 했다든지, 이미 갖고 있는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든지. 그러나 이마저도 상대방의 동의가 없으면 안 된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의사결정을 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집 구하기'라고 꼽고 싶다. 인생 최대의 지름이며, 가장 무거운 계약을 앞두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내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부동산이 이렇게 난리인 것도, 결국 '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둘의 가치관을 합쳐 집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어른들의 입김 없이, 오로지 둘의 의견만 생각하면 되는데 그마저도 힘들었다.)


C는 내가 아프고 나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고,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고 나서야 새로운 보금자리가 가져올 의미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이후 C는 집을 알아보는데 열정적이 되었고, 신혼집 이후에 이사한 집 또한 C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뽐뿌는 내가 넣고, 실천은 C가 한다.) 그렇게 우리의 첫 번째 고비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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