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활짝.
꽃을 피웁니다.
화분을 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것을 보게 되었다. 샀을 때 환하게 피어있던 꽃들이 물을 잘 주었음에도 말라 색이 변하고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이리 빨리 져 버리는 걸까 내심 속상하기도 했다. 그래도 집에 놓은 지 며칠 되지 않아 화분 전체를 말라비틀어지게 하여 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매일 물을 주고 나름 신경 쓰며 돌보았다.
그때의 나는 꽤 바쁘게 지냈기 때문에 화분을 잘 관찰하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핑계일 수도 있지만.
다만 그럼에도 매일 십 초 정도의 시간을 써 물을 주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새벽부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환기를 시킬 필요를 느끼고 창문을 열었는데 코가 얼얼할 정도의 진한 향기가 나를 휘감았다. 이 향기를 가진 인센스 혹은 방향제가 나에게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조금 당황하면서 이 향기의 원인을 찾아 두리번대다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꽃이 져 버린 줄만 알았던 화분에 이전보다 더 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몇 송이가 피었는지 세다 너무 많은 꽃들이 피어 있어 세는 것을 포기하고 잠시 나를 멈춘 채 그저 시선을 그 꽃들에 고정했다. 아주 진부하고 반전이 없는 표현이지만,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더 놀란 것은 그 많은 꽃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전부 동일했다는 것이다.
나는 전형적인 “수포자”이며 “문과” 형 사람이다. 그래서 꽃이 왜 다 한쪽만 바라보고 있는지 과학적인 이유를 대지는 못한다. 사실 대고 싶지 않다. 그저 이 많은 꽃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자연이 가장 지혜롭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꽃은 자신이 필 때와 질 때를 누구보다 잘 안다. 과한 것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물과 영양이 필요 이상으로 과할 때, 그 꽃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며 과한 것이 늘 좋은 것이 아닌 것을 표현한다.
바라볼 방향을 인간보다 잘 안다. 광합성 비슷한 것을 하기 때문일까, 꽃이 바라보는 방향은 나의 집 창가에서 해가 드는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 열과 온도를 온몸으로 기뻐하며 받는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이 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저 살아있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이 꽃과 나는 삶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나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나의 병들에게서 나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학하며 인지하고, 그 대신 더 많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며 살았다. (물론 얻은 것은 없다.)
이제 어떻게 걸어 나아가야 할지 그 방향 또한 나는 찾지 못했었다. 이 길이 맞는 길일까, 아니면 되돌아가 다른 길을 찾아볼까, 출발 대신 수많은 고민들로 수많은 밤을 새우곤 했다.
전부 피어난 꽃과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 꽃에게 더 많이 배우고 싶다.
자연스레 피어나고, 자연스레 지듯이, 이 꽃의 흐름을 나는 조금은 배우고 싶다.
그렇게 배우다 보면 조금은 더 삶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꽃에 대하여 무심해졌지만, 다시 아껴주어야겠다. 다시 말을 걸어야겠다.
다시 배워야겠다.
그렇게, 그렇게,
꽃 한 송이의 삶에서 배워가면서,
오늘도,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