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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Grace May 14. 2024

얼굴에 미소를 조금씩 띱니다.

최종장

나는 잘 웃지 않았다.

누군가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을 때, 웃긴 무엇인가를 볼 때, 사진을 찍을 때조차도 나는 웃지 않았다. 웃을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혹은 웃는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나의 약점을 보이게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혹은 어려서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나의 외모 콤플렉스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일까. 급하게 생각해 봐도 수많은 이유들이 떠오른다.


웃는다는 것은, 얼굴에 미소를 띤다는 것은 어쩌면 꽤 비효율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때의 나에겐.

양 볼과 눈의 근육을 위로 움직여 웃는다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꽤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어릴 적 랩을 했던 기억과 그때의 허세 때문일까, 카메라에 찍힐 때 나는 웃음을 보이기보다는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것이 더 익숙했다.


실없어 보이기 싫었다. 몇 번의 거짓말들에 호되게 당한 후, 나는 누군가가 나를 얕잡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곤 했다. 지금은 체중이 많이 늘었지만, 그때의 나는 운동과 식단으로 몸을 만들었고,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곤 했다. 그 누구도 감히 나에게 다시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표정과 말투를 연습했고. 지금도 종종 나오곤 하는 강한 어조가 그때의 나는 필요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애써왔던 나의 정신병들이 사라지고, 나의 주위에 내 예상보다 더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조금씩, 느리지만 천천히 깨달아가며 나의 얼굴에는 조금씩 웃음이 피어올랐다. 나의 입술에서 조금씩 따뜻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부모에게도 잘하지 않던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 생각해 신경 쓰지 못했던 주위 사람들에게도 시선이 가기 시작했으며, 진심으로 그들을 나도 위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23년 1월과, 최근, 그러니까 24년 5월에 찍은 나의 사진들을 비교해 보게 되었다. 표정만 보았을 때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도 그 후 바로 닥쳐올 카드 고지서와 여러 압박에 나는 긴장을 조금도 풀 수 없었다. 하지만 근 1년간 감사하게도 여러 고비들을 순차적으로 넘게 되었고, 조금씩 나는 내가 [믿어도 된다]고 판단한 사람들 앞에서는 웃음을 보이고, 시답잖은 농담을 낄낄대며 주고받고,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사람은 사람이 급작스럽게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고 냉소 섞인 말을 던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타격이 없다. 아니, 어쩌면 어느 부분에서는 사실일 수 있다. 23년 4월, 나는 자살시도를 했다. 말 그대로 정신을 잃고 3일 뒤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변하기 시작한 시작은 그때부터다. 그때부터 조금씩 나의 시선을 넓히고, 주위에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변하면서 나는 변했다.


어쩌면 죽을 때가 가까워진 것이 아닌, 이 자살시도로 나는 죽었고, 다시 새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쯤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구절 하나를 인용하려 한다.


[고린도전서 15:31, 쉬운성경] 내가 여러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랑을 두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라왔고,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왔지만, 성경과, 예수,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조금은 먼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나는 소위 [믿는] 자들에게서부터 버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씩 오해가 풀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 그리고 [죽음]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나의 모든 것은 바뀌었다.


아주 가끔씩, 지금도 이전의 다혈질이고, 냉소적이던 나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은, 지금의 나는 이 이전에 거친 성격과 성질이 더 이상 나 ‘자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나의 이 예전 모습을 과거에 묻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묻고 더 이상 이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이 작업이 반복되고 반복될수록 나의 과거의 모습들이 현재의 나에게 관여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고 있다.


나는 이제 웃고 싶다. 나는 이제 웃고 싶다. 악몽과 자해와, 수많은 소리와, 눈물로 점철된 밤이 아닌, 편안하고 느긋한 밤, 가끔씩 친구들과 웃으며 공을 차고 오래간만에 뛰어 근육통이 있다는 이야기들을 떠들다 잠에 드는 왁자지껄한 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밤새 통화하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나날들이 있을지 이야기하는 아늑한 밤. 인센스 냄새와 좋아하는 음악이 함께 있는 그 밤을 맞이하고 싶다.


긴장된 아침과, 불안한 오후와, 공황이 함께하는 저녁 대신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과,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떠들면서, 가끔 웃으며 셀카도 찍고, 맛있는 밥과 커피를 즐기는 그 하루들을 보내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과거의 나는 23년 봄과 여름에 걸쳐서 죽었고, 과거에 묻혔다. 이제 나는 새롭게 살고 있다.

이제 나의 삶은 우울이 아닌, 아픈 죽음이 아닌, 쓰라린 후회가 아닌.

미소와 웃음과, 아늑함과, 미래에 대한 기대만 있는, 그런 삶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나의 과거를, 나의 아픈 모습들을 과거에 묻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나는 얼굴에 웃음을 피우고,

그래서 나는 다시 사는 삶을 사랑하고,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하고,

그래서 나는 웃으며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그렇게,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간다.


*그동안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요일에는 에필로그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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