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Grace Dec 17. 2024

준비

그대라는 사랑을 기다려요.

더러운 방을 청소해야겠다. 큰 비닐봉지에 쌓여있는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담아야겠다.

하루, 이틀을 살아가며 쌓인 삶의 흔적들을 담고, 정리해야겠다.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오늘 마무리해야겠다. 세제를 풀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손을 넣어서 살기 위하여 입 안에 넣은 것들의 흔적을 닦아야겠다. 마치 아무도 식사하지 않은 것처럼, 모든 흔적을 지워야겠다.


옷을 벗고 몸을 닦아야겠다. 어느새 몸에 밴 담배 냄새와 악취를 흘려보내야겠다.

비누로 거품을 내어 몸을 닦고, 수염을 깎아야겠다. 삶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씻지 않은 몸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기에 전부 닦아야겠다.


밖은 너무 춥지만 잠시 외투를 입고 나가야겠다. 근처 할인 마트에서 저녁 재료를 마련해야겠다.

할인하는 닭과 돼지고기, 몇 가지의 야채와 양념을 좀 사야겠다.


초를 사야겠다. 아무리 치워도 여섯 평 방 안에서의 십 개월을 이야기해 주는 냄새를 지우기 위해 초를 사야겠다.


서랍에서 향을 꺼내야겠다. 초 하나만으로 가려지지 않는 냄새를 지워내기 위해서, 혹은 덮기 위해서 향에 불을 붙여야겠다. 약간은 매운 연기가 나의 폐를 찌를지라도 오늘은 향을 피워야겠다.


길에서 꽃을 파는 아저씨가 보인다. 한 송이, 가장 볼품없지만 가장 아름다운 식물을 산다. 간단한 포장을 부탁하고 담배에 불을 붙여야겠다. 딱 지금까지만 한 대를 피워야겠다.


차가운 문을 열고 들어가야겠다.


사용한 지 오래되어 먼지가 쌓인 칼과 도마를 꺼내야겠다. 냄비와 팬을 닦아야겠다.


사 온 재료를 손질해야겠다. 음식에 칼을 대 본 것이 너무 오랜만인 것 같지만 잘할 수 있을 거야.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야겠다. 기름을 두르고, 손질한 재료를 올려야겠다. 찬장에서 즉석 밥을 꺼낸다.

살짝 힘을 주어 뜯어야겠다. 전자레인지에 돌려야겠다.


띵, 2분이 지났다. 밥을 꺼내어 그릇에 담아야겠다. 아, 오늘은 손님이 온다.


어느 정도 완성된 요리를 이 날을 위하여 몇 달 전 준비해 둔 접시에 예쁘게 담아야겠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아야겠다.


틱, 틱, 틱, 틱,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공연장의 함성보다 더 크고 무겁게 들린다.

시간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옷을 갈아입고, 혹여나 지워지지 않은 냄새가 있을까 향수를 뿌린다.


그대를 기다린다.

그대를 기다린다.


음식도, 초도, 다른 향으로 덮인 나의 방과 몸도, 조심스레 고른 꽃도 준비되었다.


문을 두들겨 주기를, 초인종을 눌러 주기를.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한다. 어서 와 주기를.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준비한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만일 그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준비한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