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십 분이어도 충분하니까.
습작_01
Prologue
“영화 같이 볼래요?”
몇 번의 짧은 만남과, 몇 번의 짧은 대화 후 그녀가 그에게 말한 데이트 신청이었다. 남자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남자의 두 볼이 뜨거워졌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리라.
남자는 영화를 좋아한다. 어릴 적 바쁜 그의 아버지는 평일에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가 많았고, 그에 대한 부채감이었는지 토요일 아침만 되면 열 살 남짓한 아들을 그의 무릎에 앉히고, 그때만 해도 흔했던 CD로 구운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았다. [토요시네마]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면서.
점차 애니메이션부터, 모두가 사랑하는 판타지 영화인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까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 때문에 보았던 영화는 이 아이에게는 어느새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가 되었다. 자신의 노트북이 생긴 이후로는 그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영화를 보았다.
친구가 많지 않았기에 다른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게임을 하거나, 축구를 하는 시간 대신, 이 남자는 영화를 보며 비어있는 시간을 채운다.
그렇게 이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어느샌가 남자가 되었다.
여자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두 시간, 혹은 세 시간까지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화면만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이 여자에게는 고역이다. 차라리 집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며 휴대폰도 만지고, 부모님과 대화도 몇 마디 하며, 심지어 가끔씩은 요가 매트를 깔고 운동을 하는 것이 더욱 편하다.
이 여자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 이후로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으며, 사람이 많은 곳을 방문하게 되면 괜스레 긴장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집에서, 혹은 몇 있는 친한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 그녀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친구와 수다를 떨며, 몇 가지의 간식을 집어 먹고, 마음 편히 머리를 비우는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이 여자도 성인이 되었고, 어느샌가 여자가 되었다.
첫 만남은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흔한 동네 카페였다. 남자는 커피를 좋아한다. 향이 좋다는 입소문만 듣고도 한 시간 거리 정도는 가뿐히 갈 수 있을 정도로 커피를 좋아한다. 그날도 그는 친구에게 카페를 추천받아 삼십 분 정도 되는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가 향이 좋다는 커피를 주문하고 바쁜 평일에는 읽지 못했던 책을 꺼내어 읽는다. 이럴 때 아니면 읽기 힘든 두꺼운 책을 꺼내어 글자와 글자 사이에 있는 미묘한 감정을 꺼내어보려 한다.
무뚝뚝한 점원이 만사 귀찮다는 목소리로 커피가 나왔음을 말했고, 이 남자는 잠시 책을 덮어두고 커피를 가지러 간다. 향이 좋은 커피를 마시기 직전 가지러 가는 발걸음은 항상 가볍다. 간단한 목례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대체하고 뜨거운 커피를 쏟을까 조심히 자리로 돌아간다.
쿵, 쨍그랑.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기분 좋게 기대했던 커피는 남자 대신 바닥이 먹게 되었다. 유리잔은 깨져 그의 손에 작은 상처를 만들었다. 당황했다. 어느 정도 화도 났다. 그토록 기대했던 주말 오후 자신만의 시간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커피 향 대신 바닥과 인사해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정말 죄송해요! 많이 다치셨어요?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귀에 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다. 근데 여자가 갑자기 나한테 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한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하는 듯이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말을 더듬으면서 사과를 한다. 왜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건지 어안이 벙벙한 그때, 그 여자가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 없이 다리를 꼬았는데, 정말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발이 그쪽으로 가 있었고, 정말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닌데, 아 어떡해 정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횡설수설 그녀는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제야 그는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친구와 있던 이 여자가 다리를 꼬았으며, 그 다리는 아주 불행하게도 테이블 바깥쪽으로 빠져나왔으며, 더욱이 불행하게도 하필이면 이 남자가 걷는 방향으로 다리가 삐져나와서 그가 바닥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 여자는 이제 눈물까지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침묵했다가는 정말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아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낸다.
“괜찮습니다. 잘 보지 못하고 걸었던 제 잘못도 있어요.” 그리고 조금 더 뒤를 바라보며 그 무뚝뚝했던 점원에게도 말을 건넨다.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깨진 잔은 제가 변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금액과 계좌번호 말씀해 주시면 입금해 드릴게요.”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쏟아진 커피를 냅킨으로 닦고, 괜찮다고 극구 사양하는 점원에게 다가가 깨져버린 잔의 가격과 계좌번호를 받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아직도 어쩔 줄 몰라하는 여자에게 가 다시 말을 건넨다. 괜찮다고, 다친 것 같지도 않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사실 그는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저 귀찮을 뿐이다. 어서 얼마 남지 않은 이 주말을 제대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클 뿐이다. 읽지 못한 책의 글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며, 테이크아웃으로 바꾸어 다시 주문한 커피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다만 이 여자는 아직까지 횡설수설하며 사과만 반복하고 있으니, 어서 진정시키고 다시금 주말을 즐기고 싶기에. 넘어진 것은 남자임에도 이 남자는 계속해서 여자를 달래고 있다.
“… 정말 괜찮아요?” 아직까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네 정말 괜찮아요.” 애써 귀찮은 표정을 감추고, 미소를 지으며 그가 대답한다. 그럼에도 아직 울 것 같은 표정이자, 그는 조금의 장난기가 섞인 말투로 “만약에 아직도 많이 미안하면 다음에 여기서 커피 한 잔 같이 해요. 만약에 그래도 더 미안하면 근처에서 밥도 같이 먹고요.” 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어느새 진정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한다 “네, 번호 주시겠어요?”, “그럼요, 네?” 이제 남자가 당황할 차례다. 대충 마무리하고 주말을 즐기려 했건만 대화가 길어진다. 그리고 정말 슬프게도 평생 여자와 많은 대화를 해 보지 못한 이 남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모태솔로]인 이 남자에게 이런 상황은 전혀 계산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다시 그녀에게 질문을 한다. “갑자기 번호는 왜요?”
‘설마 진짜로 다시 만나자고?, 나를 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할 새도 없이 그녀는 다시 그 남자의 눈을 쳐다보며 대답한다.
“여기서 다시 만나자면서요, 밥도 먹자고 하셨잖아요? 우리 그러면 약속을 잡아야죠.”
어느새 또렷해진 그녀의 목소리는 도리어 그의 머리를 헤집어 놓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당황하는 그에게 그녀는 손을 내민다.
그 손을 보고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흔들리는 눈동자만 보여주는 그에게 그녀는 다시금 재촉한다.
“핸드폰 주세요.” 무엇에 홀린 듯 휴대폰을 꺼내어 잠금을 풀고 그녀의 손에 건넨다.
어느새 그녀의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저장되었고, 자연스럽게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눌러 그의 번호 또한 그녀의 휴대폰에 저장한다.
“꼭 연락 주세요. 제가 살게요.” 연락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목소리로 그에게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그는 들릴 듯 말 듯 대답하고 쫓는 사람 하나 없지만 바쁘게 뒤를 돌아 카페를 나선다. 너무 많은 일들이 십 분 남짓한 사이에 지나갔고, 비슷한 경험 하나 없는 남자에게는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기에 주말을 즐기자는 계획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하철에 타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이 남자의 휴대폰에 진동이 한 번 울린다.
- 책은 다음에 만나면 드릴게요. 꼭 연락 주셔야 해요. - 카페, 여자.
문자를 확인하고 그는 한숨을 푹 내 쉬고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무어라 답장해야 할까,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두 시간 같은 오 분 간의 고민을 마치고 휴대폰 자판을 두드린다. 잘 한 대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옆 자리 승객에게 검토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파란 화살표 버튼으로 답장을 보낸다.
- 다음 주 토요일 한 시 괜찮으세요?
‘답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너무 섣부르게 답장한 거 아니야?’ ‘왜 번호는 주고, 책은 두고 가서…’ 등의 자책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시 한번 그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린다. 손을 떨며 잠금을 풀고 내용을 확인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맺힌다.
- 네, 좋아요! 늦지 않게 갈게요! 오늘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다음 주에 밥까지 살게요. 꼭 늦지 말고 오세요!
미소를 지은 채 본인도 알지 못하게 아주 작은 소리로 그는 한 마디를 읊조린다. “싫지는 않네…”
벌써 이 남자의 마음은 토요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