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게 참 좋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버리고 조금 걸어야 할 지하철을 이용합니다. 통 넓은 청바지에 좀 요염해 보일까 싶어 보랏빛 블라우스 차림으로 출근을 합니다. 아침길은 다양합니다. 그 길을 영화,‘로마의 휴일’에 앤공주처럼, 세상 처음 구경하듯 그렇게 걷습니다.
차들을 피해 서둘러 걸어가는 동료가 보입니다. 몹시도 걸음이 바쁩니다. 삼십 대 중반이니, 그럴만합니다. 새벽부터 바빴겠지요. 챙겨야 하는 것이 오죽 많겠습니까, 남편에 아이들 밥 먹여 학교 보내고, 대충 집안 정리에 출근을 하려니 여자의 소리가 높아집니다. 이 시기에 남자는 이 여자가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가 맞는지? 여자도 저 남자가 자기를 사랑해주었던 그 남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허나 그 속에 아직 그 여자가 산다는 걸, 남자여(나도 여자ㅎ), 알았으면 싶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가물가물 합니다만, 있었지요. 어찌되었든 예뻐 보이고 싶었고, 혹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까 싶어 그러하지 않으려 애를 썼던 그런 시절이지요. 달콤한 입맞춤에 가슴 설레던, 돌아서면 보고 싶고, 시선 머무는 곳 그 어디든 그가 살았던 그런 시절이지요. 그런 그와 늘 함께 있고 싶어 결혼을 합니다.
여자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비위가 몹시도 약했던 여자가 아이의 똥을 치워 가며 그 손으로 뭔가를 집어 먹기도합니다. 코끝으로 냄새도 맡아가며 똥색이 고우면 마음도 환해집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살면서 힘들지 않은 때가 있을까요? 지나고 보면 그때가 좋았는데, 매 순간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이 돌봄에 커피 한잔 여유롭지 못한 것, 목 늘어진 티에 화장은 엄두도 못 내는, 어쩌다 독신으로 연애만 하며 손이고운 친구를 만나면 더 초라해지며 속상했던,
아이들의 주장이 강해지면서 남자는 아군이 되었다 적군이 되었다, 박쥐가 따로 없습니다. 전략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어깨를 걸치고 걸어 나갈 수 있을지, 패잔병으로 남아 구원병을 기다려야 할지, 행복에 의미를 추구해야 합니다.
동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십 분이면 갈거리를 전배의 시간을 줍니다. 복덕방도 지나고, 초록빛 페인트칠을 한 카페도 지나고, 세탁소, 꽃집을 지나 알록달록한 간판들과 아침마다 마주치는 그네들도 지납니다.
주저앉은 그대의 그림자가 깁니다.
아직 해가지지 않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살아낸 날들이었고
어떡하든 살아갈 날들입니다.
그대 힘겨워 말아요.
오늘은 오지 못한 이에게 가보고싶던 그 날이었고
남은 날들은 우리가 살아낼 그 날들입니다.
그대 잠시만 그렇게 쉬어요.
술이라 도취할까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춥시다.
입은것 다 버리고
해야 할 사랑도 합시다.
그리고 일어서요.
누구도 내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대
오지 않은 내일은 던져둬요.
걸어왔던 그 길에
거름 망하나 걸치고 다시 걸어가면 됩니다.
어제는 떠나고
오늘 지나 또 오늘입니다.
그 길 위에 우리 가서 있습니다.
곧 축제의 날이 오겠지요.
그대 가는 그 길이 기쁘고
사랑할 수 있는 날 되도록
소망하는 이 여기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옷차림이다. 그중, 꼭 한 분을 난 여장군이라 칭한다. 오늘은 레이스 살랑거리는 검은 원피스다. 그 연세에 그 체격에, 소화하기 쉽지 않음에도 위풍당당하다. 장검 들고 광화문 사거리에 서 계시면 이순신 장군 여동생쯤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래도 오늘은 빨간 미니스커트가 아니니 다행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원색의 차림을 한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 보인다. 걸음도 가볍다. 어쩌면 삶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더 긍정적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치는 이들 중 젊은 사람보다 연세가 드신분들의 옷차림이 화려하다. 그러고 보니 그네들은 이제까지의 삶을 잘 살아낸 노병임이 틀림없다. 난 섹시한 노병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