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by 여름나무

지랄스럽게,

우울이 비처럼 내린다.

마음에도 장마가 들었나 보다.


새삼 비가 온다 해서 뭐 이렇다 저렇다 할 것도 없는 무뎌진 날들 중에 만난 하루,

이런 날은 꼼짝없이 긴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래서 뭐? 괜한 트집이라도 잡고 싶어 졌다. 물고 늘어질 것이 있다면 욕심껏 물고 늘어져야 겨우 버틸 수 있는 불안한 하루가 된 것이다.


좀처럼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이런 날은 보석 상자를 다루듯 전화기를 매만지게 된다. 뜬금없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는 이유로 말이라도 섞어지고 싶은 것이다.


한때는 모든 결핍에 이유가 나의 탓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너의 탓이 되었고, 살아가는 날은 곪아 터지는 상처에 붙일 밴드를 찾는 일이 되었다.


얘가 웬일로 싶은 어정 정한 대답에 또는 몹시 바빠 허덕이는 소리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 행위 뒤에 찾아올 공허감에 몹쓸 전화기를 던져놓고 만다.


누구의 탓도 아닌, 결국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배워가야 했고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며 살아간다는 건 쓰리고 아픈 일이 되었다. 그래 가끔은 달콤한 것들이 필요했고, 이렇게 비가 오는 날 그 달콤한 것들이 유난히 당겨지는 것이라 미뤄 붙이기로 한다.


긴 하루, 이럴까 저럴까 생각이 많았다.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 초록을 수혈하듯 젊은 작가의 시집을 들었지만 온통 아픈 얘기다. 생각해보니 그때라고 빛나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그 찬란한 시간엔 아픔마저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제 아픈 사랑을 갓 끝낸, 어쩌면 마지막 연애일지도 모른다는 삼십 대 작가의 불안감이 우습게도 내겐 있을지 없을지 모를 붉은여우구슬 하나, 내 몸 어딘가에 라도 남아 숨어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비가 온다 해서 딱히 할 말이 있는, 이제 감성에 젖어 들고날 날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리는 비가 뭐라고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만 것이다.


돌아다보니 가장 행복한 시간이 가장 아쉬운 시간으로 남아 가끔은 이렇게 아픔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곰삭아질까 싶었던, 몇 해에 걸쳐 가장 햇빛 좋은 날들만 골라 말려두었던, 이왕이면 제일 예쁜 꽃 보자기로 싸매 된장독에 묻어두었던 그런 이야기들이다.


커피가 간절해졌다.

마음 같아서야 온화한 불빛 가득한 곳으로 가 모든 습기를 말리고 싶었지만, 들어선 카페는 찬바람만 쌩쌩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두 잔째의 커피를 마시고서야 편하게 숨이 쉬어진다. 그제야 움켜쥔 커피 잔을 바라보던 시선을 창밖으로 내놓았다.


차양 끝에,

밥벌이를 위한 건지, 마땅치 못한 시간을 죽이려는 건지

이런 날에,

비가 오거나 말거나 리어카를 끌고 나와 폐지를 줍는 노인이 잠시 비를 피해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마음이 그의 곁으로 가 나란히 한다.

젖은 박스의 무게만큼이나 비를 머금은 노인의 어깨가, 그의 시선이 땅속 깊이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에,

감히 상상치도 못한 오십 대를 덤덤해지려 애쓰며 살아가고 있듯이

또 상상도 되지 않는 저 나이를 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의 삶에 잊지 못할 아름다운 날들이 얼마나 쓸까 싶었다. 대답처럼 허공 속으로 그의 담배연기가 뱉어져 사라져 간다.


저 나이가 되기 전,

쏟아지는 별들이 아름다운 겨울에 땅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다녀 올 생각이다. 편안하게 몇 날을 보내고 담자리 꽃 한 바구니를 사, 싸매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 꽃과 함께 얼음에 땅에 뿌려두고자 한다. 어쩌면 반짝이는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앉아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전해줄지 모를까 해서다. 전해지는 옛이야기는 모두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서울에 하늘은 이제 불빛이 별빛이 되었다. 그래 비가 오는 밤에 서울의 별들은 저마다의 상처로 눈물을 흘린다. 나도 이리저리 부딪치며 숨 가쁘게 살아온 지난날들을 위해 쬐금 울어볼까 한다.


이래저래 애썼다. 그래 이리 여유롭게 아무 곳이나 들어앉아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오늘이 아름답지 않은가 생각 되어진다. 그래 오늘 하루 진종일 흔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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