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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Jan 08. 2021

눈 내리는 날에

바람도 하얀 아침 길이다.

숨을 내쉬자 지열로 연기를 뿜어내는 분화구처럼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용가리? 쿵쿵 걸어보며 재미 삼아 입김을 불어 보지만 역시 불꽃 없는 연기만 맥없이 토해져 나온다. 활 활 타오르는 불길을 뿜어낼 수 있다면? 잠시 즐거운 상상이다.


상상과 달리 현실은 바이러스 감염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어느 곳이고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 통행증을 제시하듯 마스크를 쓰고 지하철로 출근 길을 서둔다. 이래저래 마음 편치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19 사태가 벌써 일 년을 넘어서며 또 끝은 언제일지 확실치 않으니 지칠 만도 한 것이다.


코로나 19 사태가 끝나고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듯, 어쩌면 우리의 삶은 기다림에 연속일지 모른다. 그렇게 내심 함박눈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나 보았다. 흐린 날이면 창문 앞으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야속하게도 잊을만해서야 깜깜한 밤이면 손님처럼 다녀갔다.


카프카의 변신과 달리 퇴근 후에는 자발적으로 한 마리의 굼벵이가 되어 산다. 몸통을 이용해 느릿느릿, 따끈따끈한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이 좋았다. 그런 밤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앓이를 하던 사람처럼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젖어들어야 하겠지만 우습게도 출근길을 걱정하며 서둘러 굼벵이로 되돌아가고 만다. 점점 사는 날의 모든 것이 잠깐으로 족해졌다. 가로등 불빛에 골목으로 내려앉는 눈이 잠시 스치듯 상흔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내 눈 속으로 파묻히듯 사라진다.


유난히 추울 겨울이라 했다. 하지만 우린 이래저래 힘든 이 겨울을 잘 참아내며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순백의 공간을 펼치며 모든 것을 감싸줄 눈 내리는 계절 속에 많은 것을 생각지 않아도 좋았던 유년의 기억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냉정한 현실에서야 교통혼잡에 불편한 생활, 각종 사고를 유발하지만, 추위를 잊고 동네 아이들과 논밭으로 뛰어다니며 벌였던 눈싸움이, 놀기에 바빠 발이 언 줄도 몰랐던 밤이면, 동상기로 간질간질한 발을 위해 검은콩을 담은 양말을 신겨주던 사람에 정이 그곳에 머물러 힘을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날엔 울컥, 시선 끝이 모두 기억인 기차역으로 가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떠나고 싶어 진다. 이렇게 눈발이 날리던 날이면 어린 손녀를 바라보던, 측은하던 눈길이 더 깊어지던 내 할미의 따스한 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갈 곳 없는 지금 기차역으로 가면 얼룩진 기억 속이라도 서성거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갓 역으로 들어서는 이들 중엔 필시 함박눈처럼 푸근한 사랑을 담아오는 이도, 떠나는 이들 중엔 햇빛에 반짝이는 눈처럼 소중한 사랑을 전하러 가는 이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시리게 다가서는 이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 지는 날이다.


눈 내린 도시는 어느 때보다 고요해진다. 발길이 회상의 숲으로 들어섰다. 좋은 날을 잡아 바람 속으로 뿌려진 내 할미가 봄의 땅으로 가, 눈처럼 고운 꽃으로 환생되었으면 하여 진다. 그러고 보면 어느 때이고 혼자인 시간은 없었다. 언제나 기억 속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였다.


잠이 무겁게 쏟아져 온다. 뽀드득뽀드득 정말 흔한 시구처럼 눈 밟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뽀안 꿈길에 눈처럼 그리운 이 다녀갔으면 좋겠다. 


봄이 오면 코로나 19도 눈처럼 녹아내려 사라지기를,


1.

잔칫날이든

초상집이든

가난한 노인네에겐 그저 그런 날만 많으면 좋았다

전을 부치다 말고 치마폭에 비닐봉지 감춰

등짝을 때려가며 뭘 쳐 먹여도 살 오르지 않는 계집을 위해

집으로 달음박질하는 배부른 날이 되었다


잔칫날도

초상집도 아닌데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마을 아낙들이 모여들어 부쳐놓은 것 같은 전을

치마폭에 숨겨 담듯 분홍빛 시장 가방에 사 담는다


여자들 살기 편해졌다는 세상

집으로 가 포장을 풀어 펼치면

이젠 어느 날이고 잔칫날인 세상이다


그런 길에 시장 거리를 흘깃하다가

좁은 골목에선 흔하게 지나치고 말 인연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한 너를

내가 알아보았다


봉선화꽃 같던 얼굴이

마른 대추를 닮아가고 있는 너와 난

어느새 내 할미처럼 늙어가고 있었다.

반가움이 꽃처럼 핀다


어찌 살아왔을까?

궁금증을 난전처럼 펼쳐진다

울보 딸내미는 시집을 갔는지?

업고 다니던 아들은 어찌 컸는지?

아파하지 마라

물음은 주문 같은 기도가 된다


가물가물해지는 기억력으로

허술하게 웃어넘겨도

저미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듯

시절을 거슬릴 순 없는 것이다


모든 때가 한때인

그런 때가 있다는 것으로

서글픔에 값을 치른다


2.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편한 세상살이가

글보다 의미를 담은 그림 하나로

유리 벽을 알아채지 못한 새처럼

핸드폰 속으로 추락한다


이리라도 생각해주는 그들이 고맙고

기억하는 내가 슬퍼졌다


어쩌다 한 번씩 떠오르는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모든 것들이 아주 가끔 

어제 일처럼 떠오르지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두서없는 그리움이다


오늘도 우린 이리 살아가고 있다

만사 귀찮다며 어느 것에도 저항하지 못한 채

어느 것에든 의미를 걸어 매달리려 한다

그래도 시간 뒤엔 그리운 날이 될 것이다.


3.

회상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길이다

기다림의 의미도 잊었다 생각했는데

흐린 날에는 창문 앞으로 가 선다

내심 멀리서 찾아올 함박눈처럼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온통 잿빛인 하늘

땅 가까이 내려앉아

눈 대신 우울을 쏟아 놓는다

바람에 휘청이는 겨울의 거리처럼 그리움이 비틀거렸다


이런 날엔 어느 술집으로 가

얼룩진 페인트 칠에 기름때 늘어 붙은 벽 가까이 앉아

술이 나를 마시듯

그리움에 취해 쓰러져도 좋을 것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어색함을 위해

짐짓 누군가를 기다리듯 시계를 들여다보며

가엾은 늙은 시인의 시집도 들썩여 보리라


그러다 술 취해 낯빛 빨갛게 피어나면

변변한 보험 하나 들어주지 못한 친구에게

주저하던 마음을 접어 그리움을 전해보리라

가난에 가슴을 내어주고

사막에 여인이 돼버린 고향집 내 친구


밤사이

한때는 숲이었고 들판이었을 도시에 눈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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