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이 깊어가고 있다.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다.
일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 또는 추워서 견딜 수 없는 달이라 칭한 인디언들의 표현에 감탄하는 중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일까?
춥다는 그 말에 걸맞게 올해 겨울은 북극발 초 한파가 강하게 추위를 몰고 올 것이란 기상청 예보가 있었다. 가뜩이나 움츠러든 일상이 더욱 꽁꽁 얼어붙게 되진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내 어릴 적 허름한 옷에 고드름 따먹던 시절만큼 춥기야 하겠냐 싶은, 겨울은 겨울에서만 찾을 수 있는 행복이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태풍의 눈처럼 겨울의 한가운데 머물러있는 시간이 잔잔하다. 며칠째 집 밖을 벗어나지 않아 추위를 실감하지 못하면서도 입으로는 춥다 춥다를 연발하며, 뭉개는 것이야말로 겨울에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란 결론을 내고 만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겨울밤이면 목청껏 ‘찹쌀떡, 메밀묵’하고 들려오던 소리가 사라져 버렸음을 생각해 냈다. 배달 앱이 있어 안 되는 것 없이 배달되는 세상이니 찹쌀떡 장수가 살아남기엔 벅찬 세상이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별개 다 그리워진다는 생각에 불현듯 헛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독서를 통한 세상과의 만남이 아닐까 싶다. 앉은자리에서 계절과 상관없이 장소와 시대를 벗어난 여행자가 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새해 들어 좋아하는 작가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철저하게 나의 관점(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글을 이어가는 작가의 글이, 아버지의 부재를, 그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이 아들들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서는지 새삼스레 이해를 요구해왔다. 독서량이 부족하다 보니 그럴 수 있겠지만 대부분 접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글들과 달리 상처 받은 남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써낸 작가의 글은 유달리 슬프고 아름답게 다가와 같은 아픔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더 깊이 빠져드는 뻘처럼 슬픔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동여매는 습성을 가졌나 보다. 스무 살이 되도록 조모의 손에 성장한 나에게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은 허구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였을 뿐, 가져보지 못한 것이었다. 하나 그 허상을 잡으려 하다 공허한 분노 앞에 맥없이 무너진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침체된 내면의 바닥을 가볍게 막대기 끝으로 조금만 건드려봐도 떨어진 물고기의 비늘 같은 상처 조각이 수없이 반짝이며 일렁일 것을 나만은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격은 유전적 기질과 환경이 더해져 만들어진다. 쌍둥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환경에 상관없이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 하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것에 비중을 두든 태교의 중요성과 환경의 영향은 곧 양육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결론이다. 그 양육과정에서 형성된 애착이 한 사람의 인생을 뒤집어 흔드는 바람이 되는 것이다.
작가의 글을 읽을 때면 상처 받은 한 마리 늑대 앞에 선 사람처럼 깊은 연민에 빠지고 만다.
축복이거나 형벌이 될 수 있는, 선택의 기회 없이 태어난 우린, 성장의 과정에서 신의 존재에 의지하거나 거부하려는 진통을 겪어내며, 불안한 존재에서 벗어나고자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굴레처럼, 고스란히 슬픔을 받아들이며 가슴에 담아두었던 작가는 글을 통해 해감하듯, 조금씩 조금씩 잔여물을 내보내듯 자위적 사랑으로 작품을 통해 승화의 과정을 겪어낸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가끔 숨어있던 어린 기억을 만날 때가 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새들도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싶어, 혹여 서울로 떠난 엄마가 들려갈지도 모른다는 가당치 않은 기대로, 사방치기 놀이 중에도 수시로 동구 밖을 내다보았던, 꿈을 꾸다 깨어나는 순간이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그 기다리던 엄마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시절이 되었지만, 여전히 꿈속에선 결핍에 힘겨운 아이가 되어 미처 채우지 못한 그리움으로, 잠 깨어난 뒤 한참의 시간을 쓸쓸함에 젖어드는 것이다.
살기가 편해졌다는 세상이 어찌 된 일인지 점점 어렵게만 느껴지는 세상이다. 실제적 고통에 심리적 고통은 더해져 우리를 절망으로 치닫게 하기도 한다.
중장년의 삶은 어떠한가? 혼란 속의 두 얼굴은 힘겨웠던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면서도, 사는 것에 바빠 돌보지 못한 자신을 연민하게 된다. 활기차던 삶은 갑자기 공허해지고 곪기도 해, 남편의 보물상자를 열어보라는 제우스의 꾐에 빠진 판도라처럼 어떤 결핍이든,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결핍을 채워보려 방황 속으로 빠져들기도 하는 것이다.
기계에 끼여 죽음을 맞이한 오십 대 여성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듣게 되었다. 아찔하게, 그녀가 느꼈을 순간의 고통에 가슴이 더 아파왔다. 마음 한 자락 끝이 그녀의 다음 생은 행복한 삶이 되기를 모든 신께 비는 날이 되었다. 어찌 보면 얼마나 배부른 투정을 하며 사는가 반성하게 되는 일이다.
세상살이야 각자의 몫으로 살아간다지만 몰아닥친 한파를 겪어 본 사람이 아직 겪어내지 않은 사람을 위해 너그러워져야 할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혹여 나의 상처로 사납게 살아내는 날은 없었는지, 좀 더 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며 그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삶이 되려면 어찌해야 할지, 깊어지는 밤이다.
유독 춥다는 이 겨울을 모두가 잘 살아내었으면,
이 밤 창문을 열면 눈이 내리고 있을까?
구태여 확인하고 싶지 않다.
이젠 아는 것보다 모르고 넘어가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