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벽면이라도 집안 어딘가를 초록빛 페인트로 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산책 삼아 마트로 걸어가 둘러맨 천 가방에 청자몽을 사담아 온다. 데구루루 식탁 위로 쏟아지며 구르는 연두 빛 자몽이 빠르게 마음속으로 굴러들어가 온통 초록의 싱그러움을 가득 채워 넣는다.
단조로움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겨울날의 일상이 청자몽 여섯 개로 이리 행복해질 수 있다니, 놀라웠다. 어쩌면 삶은 늘 초록빛처럼 싱그럽게 다가와 우리를 기쁘게 하려 애써 왔지만 지나친 욕심에 받아들이지 않으려 핑곗거리를 찾아 맞서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잠시 마주 서게 된다.
청개구리처럼 가끔, 한 여름날엔 눈 내리는 겨울날이 그리워졌고, 그러면서 막상 눈 내리는 겨울날엔 또 뜨겁던 여름날이 그리워졌다. 그러한 변덕스러움 때문일까?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허상에 불과한 욕심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반성을 해본다.
입 안으로 퍼지는 상큼한 신맛이 일순간 잠들어 있던 모든 세포들을 깨워 밤하늘에 터지는 폭죽처럼 갑작스레 기분을 즐겁게 만들었다.
해가 바뀌고 새로운 달이 시작되면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하지 않나 싶은 무언의 압력을 받게 된다. 그러다 곧 작심삼일이 괜한 말이 아닌 듯, 계획하던 것들은 너무 쉽게 늘 살아오던 습관 속으로 묻히고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이 시큰둥해지는 시간이 있다.
그러한 날에, 별것도 아닌 것이 또 사람 마음을 폭죽 터지듯 기쁨으로 차오르게 해 살아가는 날에 의미를 부여해 감사해진다.
새로운 즐거움을 만났다. 짝사랑에 몸살을 앓는 사람처럼 그가 지나는 길목에 서있다 그와 마주치기를 기다리듯 월요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세상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실력자와 한때는 잘 나갔지만 한 번 더 기회가 필요한 가수들이 대중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돕는 ‘싱어게인’이란 리부팅 오디션 티브이 프로그램 때문이다.
매 순간 우린 모든 것에 의미를 두려, 또는 의미를 찾는 것이 습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글 몇 줄을 읽어도 좋아지는 무언가는 내 인생의 의미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고 싫어지는 무언가는 내 인생의 의미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하는 것이 전부 인, 인생의 의미가 이처럼 분명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매사 의미를 찾는 우리가 용기를 얻는, 또는 대리만족을 맛보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열정을 지켜보는 일은 모처럼 가슴을 뛰게 하였다. 아직 내게도 이런 것에 들끓는 즐거움이 남았다는 게 기뻤다.
별들이 제각각 빛나듯,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같던 인생을 피워보고 싶다는 29호, 딱 3초 간 빛나고 사라지지만 최선을 다하는 노란 신호등 같은 가수가 되고 싶다는 63호, 교통사고로 멤버를 잃은, 이제 웃어도 될까 묻는 11호, 내 인생에 칭찬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은 영역이었다며, 받은 칭찬에 눈물을 터트리던 30호,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길을 잃은 미아 같다는, 오디션을 통해 행복한 성장을 하고 있다는 20호 등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겨울 밤하늘에 별들은 유난히 반짝인다. 언제 깨어져 얼음조각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차디찬 냉기 속에 빛나야 하기 때문일 수 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몰아붙이는지도 모르면서 무엇이고 삶에 의미를 찾는 우리도 그 별과 같다.
새해 들어 핸드폰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너무 쉽게 접할 수 있어 잠식되어간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편리성은 둘째로 치더라도 핸드폰 없는 생활이 가능할까 의문마저 들었다. 요망한 것이 사랑보다 더했다. 어느새 스며들어 돌아서기가 쉽지 않다.
곁은 열어주지 못하면서 또 많은 것을 바라는 일방적 의사소통 수단이 되어버린 핸드폰이다 굳이 불편한 것을 참아내려 하지 않는 세상과의 관계 맺음 방식이 끝나면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괜한 것들에 지쳐가고 있는지 모른다. 일터에서 삶에서, 문득 고개 들어보니 앉아있던 그 자리를 뱅뱅 돌고 있었을 뿐이다. 아기 새들처럼 무조건 부딪치고 뛰어내려 날개 짓을 배우기엔 살아온 세월이 있다. 이젠 기차를 타고 눈 덮인, 지붕 낮은 마을로 찾아가 그 아래 모여 사는 사람들과 아랫목에 발들을 모아놓고 보듬는 사람에 정을 나누고 싶어 진다.
한쪽으로 밀쳐두었던 노트북 앞에 다시 앉으니 새벽이 오고 있다. 왠지 사방의 어둠 속에 섬으로 변한 도시엔 새벽안개가 자욱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있는 이 시간이 참 행복해진다.
고농도로 함축된 의미를 담은 노랫말이 전해주는 감정에 빠져 커피를 마신다. 달콤한 사랑, 영화 같은 재회, 운명으로 치닫는 우연한 만남, 또는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을 목숨 같은 사랑, 용한 점쟁이보다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주는 점괘의 가사가 찡하게 좋다.
이 밤, 잠 못 드는 그대가 있다면 이렇게 다독여졌으면 좋겠다. 회환에 젖어 홀로 울지 않기를, 성큼성큼 그대에게 걸어가 눈처럼 내려 그대가 편히 잠들었으면 좋겠다.
요즘 읽는 책에서 와 닿는 문장을 적어본다.
「만약 머리와 몸의 컨디션이 좋다면, 당신은 영혼(마음)을 정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먼저 해야 할 필수적인 것이다. 영혼의 치료는 어떤 마법을 사용함으로써 틀림없이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법은 올바른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올바른 단어들에 의해 절제가 영혼에 뿌리내리게 된다. 절제가 다가와 머무는 곳에서는 건강이 머리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빠르게 전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