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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Feb 19. 2021

2월에

우체국 가는 길에야 눈이 내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한참 봄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모를 리 없건만 떠나야 하는 겨울도 이별의 길은 그리 쉽지 않은가 봅니다.


한 번이라도 더 회색의 거리를 하얗게 채우고 싶어 눈은 밤새워 어두운 하늘길을 서둘러 달려온 듯 보이지만 용케, 염화칼슘을 피한 눈들만 응달진 구석으로 내몰려 쌓일 뿐, 앞세운 생활의 편리에 곧 자취를 감춰고 마네요.


우체국 안으로 들어서자 녹아내린 눈이 눈물처럼 떨어집니다. 불쑥 '그리 울면 내 어쩌라고', 야속할만치 매몰찬 대답을 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길가로 나가 눈 쌓일 나뭇가지가 되어주기엔 오늘 하루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지난해, 겨울로 들어서기 전부터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이제야 하나둘씩 꺼내어 정리를 해가는 중입니다. 우체국에 들러 수선이 필요한 이어폰을 택배로 보내고 보안카드를 재발급받기 위해 은행에도 들릅니다. 잠깐 사이 더 편리해진 세상은, 큰돈 오갈 일 없다는 대답에 보안카드가 필요 없는 앱을 핸드폰에 깔아주며 카드 발급을 요청합니다. 이래 저래 말대꾸가 귀찮아지고, 어느새 뭔지도 모를 선물박스 하나 들고 눈 내리는 길을 무뚝뚝하게 걷게 됩니다.


한때는 그저 공짜라면 기를 쓰고 욕심을 채우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젠 버리지도 못할 것 쌓아두기 힘들다며 주는 것도 마다하던 모습에 웃음이 납니다. 그릇이 비어있음으로 해서 쓰임이 생기며, 물건으로 가득 찬 방은 방으로서의 쓰임이 없다는 것을, 여자라면 어렵사리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살림살이에서 터득하게 되는 경우가 이러할 것입니다.


겨울이며 봄이기도 한 계절, 이월이 그렇습니다. 그 겹쳐진 계절이 겨우내 땅속에 웅크리고 앉았던 씨앗을 초목으로 눈뜨게 하듯, 움츠린 삶도 가슴을 펼치며 일어서게 하는 희망의 달이 되어줍니다. 그래 섣부르게 피어올라 추위에 떨고 있는 꽃 봉오리도, 아직 이르다 싶어 잠 깨어날 줄 모르는 꽃씨들도 어떻게든 변화를 겪게 되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이월이기도 합니다.


묵묵히 견뎌내는 것 같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드물지 싶습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과거의 소산물인 지금에 나도, 고약스럽지 않은 미래의 나를 만들기 위해선 좋은 방향으로 변화의 길을 내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이월이 아닐까 합니다.


새순의 성장을 위해 주변을 정리해주는 기분으로 뽀글뽀글, 빠글빠글 파머를 하고자 단골 미장원으로 찾아듭니다. 미용사의 말을 새겨듣지 않아도 머리카락의 윤기 나 힘 앓이가 시원찮음이 느껴집니다. 어디 이 뿐일까 싶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게 어찌해서든 붙잡고 싶은 게 젊음인가 봅니다. 곱게 피고 싶어 영양을 듬뿍 넣어줍니다.


어디 늙음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가 또 있을까요? 씩씩한 듯 말을 내뱉지만 꼭꼭 숨겨두었던 나도 여자란, 고유한 역할을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섭섭하고 아쉬워지기도 합니다. 과도기란 말이 있지만 또 다른 계절이라 말하고 싶은 건, 아마 나름의 마지막 저항이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분명 지금 나는, 이월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새싹이 아름다운 건 꽃피울 날들을 기다릴 수 있어 그러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다가다 마주치는 젊은 연인들을 보면 그 꽃처럼 아름답단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늙음이 두려웠던 건 어떤 변화보다 그러한 아름다움을 내려놓아야 하는, 꽃자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구나 싶어 집니다. 하지만 자비로운 신은 한쪽 문을 닫더라도 다른 쪽 문은 열어놓는다는 아일랜드 속담처럼, 이월은 또 새로운 방향의 길을 내어주리라 믿게 됩니다.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대롱거리는 것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한층 젊어진냥 무겁던 하루가 가벼워지고 마음이 기꺼이 꽃처럼 피어납니다. 나이가 들어 좋은 것이 있다면 뭐든 금세 까먹는다는 사실이겠지요.


이월이 지나면,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모든 것들이 살아 숨 쉬듯, 제자리를 벗어나려 삐죽삐죽 틀어지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 삐걱대는 것이 담장이나 문짝들 뿐 이겠습니까? 또 한 계절을 살아냈으니 내 스스로 돌봐야 할 곳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맹구처럼 여기저기 땜질할 모습이 조금 우습겠지만 아무래도 두루두루 살펴가며 야무지게 단속을 해야 하는 이월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불편하실 수 있다 생각되지만 그냥 마음을 전해볼까 합니다. 어떤 이월을 보내고 계신지요?

마음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종언 화가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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