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의 하늘이 수채화처럼 거리로 내려 퍼지는 오후, 한 낮엔 눈이 부셔 바라보지 못한 것들을 차분히 마주합니다.
햇빛 좋은 자리에 선 목련은 적지 않은 꽃망울을 터트렸고 담장 대신 울타리로 심어진 개나리는 곧 꽃을 피우려는 듯 바쁜 기세를 몰아붙이는 모양새네요. 하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 빛이 더딘 곳에는 여전히, 별반 달라진 것 없는 현실 앞에 선 사람처럼 뼈대를 드러낸 나뭇가지가 암울한 빛을 띄운 채 입을 다물고 서 있네요.
비가 내리려는 듯 바람 속에 습기가 가득합니다. 이런 날엔 마음도 씻김을 준비하려는 듯 살며시 땅으로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이 비 지나고 나면 미세먼지로 뿌옇던, 그래 삭막스럽기까지 한 삼월의 거리가 말갛게 씻기어져 울긋불긋 꽃단장을 시작할 수 있겠지요.
자리이동을 하면서 많이 바빠졌습니다. 바쁘다 보니 생각은 점점 단순해지고, 무기력하게 늘어졌던 일상은 피곤해도 다시 활기를 되찾는 듯 살아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순간의 나’에서 ‘우리가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건 끔찍한 고통이라는, 정신적인 소음과도 같은 생각에 끝없이 시달리다 보면 내면의 고요함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별거가 아닌 것들이 별거가 되는,
삶이 그러한 가 봅니다.
늘 그날처럼 또는 어쩌다 새롭게,
살아가는 날들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늘 그 자리에 흐르고 있어 새로이 흐르는 강물이라는 것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 듯,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언제나 어려운 건,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나의 삼사십 대를 만났습니다. 한참 공사 중이었던 자리엔 우뚝 건물이 들어서 있고, 먼지 가득 쌓였던 구멍가게는 불 밝은 편의점으로 변해 화려함을 뽐내고 있네요. 정겹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 살고 있는지? 다닥다닥 붙어 좁은 골목길로 가정사가 넘나들던 자리엔 깎아내릴 듯한 빌라단지가 들어섰네요.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들,
예전에 살던 기억 속의 정겹던 동네는 아니었지만 그리운 날들이 많아, 입안에 짓이긴 풀냄새가 가득 퍼지는, 씁쓸함이 퍼지는 시간이 되었네요.
생의 끝이 종점이라면 나는 얼마큼 달려왔을까요? 백세시대라 하면 이제 중반을 좀 벗어났을 것이다 생각이 들지만, 출발점이 같았던 사람들이 나도 모르게 하나 둘 내려서고, 버스는 점점 텅 비어 가는 듯한 불안이 조금 외롭다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래 이따금 멈추어서는 역마다 요란스러운 호객행위라도 해 새로운 승객을 태우고 싶어 지는, 더러 간절한 마음이 들어서기도 합니다. 남은 길에 이런저런 얘기 나누며 또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면 그 길이 그리 심심하진 않겠다, 위로가 되겠다 생각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은 인생, 재정비를 해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경칩이면 깨어나는 개구리처럼 마음에도 무언가 꿈틀거리는, 태동을 느끼며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그러하기에 삼월만큼, 오는 사월보다 더 좋은 계절은 또 없겠다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앞서 항상, 쓸모에 대해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 그것을 활용할 날들이 없을 것 같아 밀쳐두는 경우가 참 많았섰지요. 그러다 보니 시작보다 포기가 많았고 생각만으로 지나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나이에 새삼’,
‘써먹지도 못할 걸’,
바꾸어 볼까 합니다.
시간은 이래도 가고 저래도 지나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망타 탓만 할 뿐 왜 그리 붙잡기가 어려운지, 나약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더 이상 수를 놓지 못하자 75세에 그림을 시작해 101세까지 활동한 화가, 모지스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러한 점에서 참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 있어 어려운 이유가 어쩌면 아집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몇 년 전, 탱고를 배우면서 포기는 곧 실패란 생각에 억지로 반년 넘게 매달렸던 일이 떠오릅니다. 모든 것을 내가 맞출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때에 따라선 접해본 것 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고, 시작하면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나 싶습니다.
잠결에,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공기에 습기가 가득해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웅크리고 앉아있던 새싹처럼 기지개를 켭니다. 커피 한잔을 놓고 길 건너 놀이터에 자리한, 이제 몸단장을 끝낸 꽃나무와 가슴 설레며 선을 보듯 눈길을 마주합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 보면 살짝 접어놓거나 밑줄 그어진 문구를 발견하는 것처럼, 삶의 순간에도 그러한 만남을 갖게 된다는 것을, 어제와 오늘이 자연스럽게 흐르듯 어쩌면 삶은 그러한 과정을 지나치는 시간이 아닐까 싶어 집니다.
그는 어떤 마음에서 그곳에 표시를 해두고 잠시 머물렀을까요? 어떤 의미로든 마음에 크게 와 닿아 그리하였겠지요? 밴드 페이지가 제게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을 밑줄 긋듯 글로 적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페이지를 덮어 책장에 꽃아 두려 합니다. 이래 주저하고 저래 주저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볼 생각입니다. 뒤돌아서면 부끄러워지는 저를, 조금 더 채워진 사람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건강하시기를요.
저는 작은 것들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눈감고 눈알 굴리기를 하고, 에스컬레이터는 발끝으로 서기, 가능하면 걷고 간단한 스트레칭 자주 해주기 등입니다. 뻣뻣해지고 둔해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싶지만 차 한잔 마시는 시간 정도만큼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꽃피고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지는 계절입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날들이 되시기를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