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날들을 기쁘게 하는 일들이 그리 클 게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따끈한 이불속에서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그러고도 한참을 더 뭉개도 좋은 겨울날이, 기뻤다.
둘러싼 고요가 뜬금없는 기억들을 불러와 다시 떠나보내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지만, 그 완전치 않은 기억의 조각을 퍼즐처럼 꿰맞추는 일조차 기꺼이 즐거움이 되는 게으름이다. 그러다 백설공주처럼 잠 깨어 눈 뜨자마자 멋진 왕자님과 눈빛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면 이리 밋밋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스스로도 어이없어 그만 웃음을 토해내고 만다.
동화를 즐기기엔 너무 멀리 떠나왔을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들, 그러한 것들을 놓지 못해 날마다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지 묻고 확인하는 왕비처럼, 많은 것들에 집착하고 불안해하며 쫓기듯 떠나온 순수의 세계가 아니었던가?
고맙게도, 밥벌이 특성상 1월 한 달은 밤 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여도 좋은, 부엉이 곳간을 감춰두고 허락된 백수생활을 즐길 수 있는 달이다. 아이들 생활 패턴에 맞춰 갖게 된 일자리가 이제는 내게로 돌아와 나만의 시간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새벽녘까지 스탠드 불빛 아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캔맥주를 마시며 홀로 영화를 즐기는 등, 맘껏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한낮이 되어 잠 깨어 일어나는 일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입맛대로 늦은 식사를 하고 바깥세상으로의 통로가 되는 둘레길에 오른다. 며칠 사이, 비추는 따스한 햇볕이 좋아 이대로 봄이 왔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날씨는 보란 듯이 기대를 집어 삼키며 제법 사나운 한겨울의 기세를 몰아쳤다.
그 길에 갈변했던 죽단화의 관목이 흠뻑 초록물을 빨아들여, 꽃말처럼 기다림에 봄이, 곧 봄이 오고 있음을 전하려는 듯 세찬 바람에 힘겹게 맞서고 있었다.
계곡물이라기보다는 낮은 개울에 가까운, 반환점인 다리에 도착해서야 난간에 기대어 보온병의 커피를 꺼내 마신다. 졸졸졸 흐르던 개울물이 얼고 또 얼어붙어 거대한 거인이 되어 시선을 마주했다. 바라보자니 새삼, 인생 급류처럼 흐르는 큰 물이 아니어서 어쩌면 다행이다 싶었다. 젊어서야 세상에 뒤쳐진 삶이 아닐까 싶어 때론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였지만, 바다처럼 큰 세상이 아니라서 머문 개울에서 소곤소곤 거리며 작은 꽃들에도,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에도, 떨어지는 낙엽에도 수줍은 미소를 건네며 살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마다의 향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의 향기가 되듯 습도가 높아진 산은 진한 나무의 냄새로, 썩어가는 나뭇잎들의 냄새로 말을 전하기도 한다.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돌아가기를 재촉하는 것이다.
기분 탓일까? 사람에 소리가 끊이질 않으니 빈 시간이 많았던 집이 흥얼거리며 즐거워하는 듯하였다. 그 흥으로 찬바람에 힘들었을 얼굴에 수줍게 붉은 꽃을 피워준다.
그래 또다시 새로운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계절을 이 해에는 푸르게 또는 붉게 꽃 피우며 만나봐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은 잃어도 사랑하는 마음은 잃지 말아야 하는 게 삶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
어떤 의미를 담아내지 않아도 좋다.
그만큼 살아냈으니 날마다 일요일 같은 오늘을 한동안 반복해도 좋을 것이다. 겨울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뭉기적뭉기적 거릴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