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위망이 점점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최근 질병관리청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고 사망자도 1만 6천230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주변인들의 코로나19 감염은 이어졌고 나 또한 그러한 위험을 감지하며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퇴근길 걸음걸이가 후들거렸다. 스멀스멀 발끝부터 시작된 오한은 전신으로 퍼져가며 나로 하여금 어디고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드러내게 했다. 눈물마저 찔끔찔끔 흐르는 것이 기어코, 몸이 심상치 않은 낌새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눌러 찍으며 이마를 집어 본다. 뜨끈뜨끈한 것이 막 김 오르는 솥단지에 올라앉은 찐빵을 연상케 하였다.
매일이다시피 자가진단키트를 이용해 코로나19 검사를 했고 매사 조심 했었다. 오늘 오후에 해치운 자가진단키드에서도 한 줄, 당연히 음성의 결과를 얻어낸 나였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몸은 주인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백기를 들고 만 것이다. 집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가진단키드를 이용해 검사를 실시한다. 선명하게, 정말 선명하게 키트에 두 줄이 그어졌다. 그렇게 내게도 7일의 격리가 주어진 것이다.
열이 오르다 식은땀이 흐르고 몸이 으슬으슬 추워왔다. 정신은 들락날락하며 혼미해지는가 싶으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반짝 멀쩡해지기도 했다. 결국 해열제를 삼키고 어수선 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에 날뛰는 머릿속을 누군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하얀 고깔에 흰 두루마기를 걸친 무녀다. 아랫목에 사람을 뉘어두고 종이로 만든 나뭇가지 채를 흔드는 것이 아무래도 굿판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친한 이웃으로 오갓을 마을 여자들도 두 손을 비벼 가며 기원을 하는 듯 보였다. 헛소리라도 내질렀는지 아들의 부르는 소리에 그만 잠에서 깨났다.
이상한 꿈길이었다. 왜 갑자기 내 어릴 적 돌아가신 큰엄마가 꿈에 찾아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농사짓기를 그만두고 인천으로 올라 가 공장에 다니던 큰엄마는 도회지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큰 병을 얻어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몇 달 동안 아랫목을 차지하고 누워 힘없이 앓다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뜨거운 물수건이라도 얼굴을 닦아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집안에 넘쳐나는 빨래 바구니며 설거지 통이 입을 다물게 만든다. 아파도 마음 편하지 못한 게 살림살이를 하는 여자의 입장인 것이다. 큰엄마를 잃고 남은 가족들이 깨진 조각이 돼버린 것도 어쩌면 그 살림을 엮어 꿰맬 사람을 잃어버려 그럴 거라는 생각이, 그런 꿈을 꾸게 하였나 보다.
다시 옅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입천장에 달라붙은 혓바닥이 떨어지질 않아 답답한 마음에 그만 잠에서 깨고 만다. 물 한잔이 간절했지만 움직일 기운이 몸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멀뚤멀뚱 눈을 굴리며 얼마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있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낯익은 세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적막함에 물보다 헛헛함에 가까운 허기가 몰려왔다.
칼칼하고 얼큰한 김치죽이 먹고 싶어 진다. 쌀 한 줌에 묵은 김장김치를 잔뜩 썰어 넣고 끓여먹던 멀건 김치죽이다. 사는 형편이 어려워 아침저녁, 하루 두 끼를 김치죽으로 때우는 날도 많았었기에 고향을 떠나고는 쳐다보지도 않던 김치죽이다. 새삼 그 김치죽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니 호호 입김을 불어 식혀가며 그것을 한 대접 먹고 나면 아픈 것도 털고 멀쩡히 일어설 것 같았다.
안 되는 게 뭐가 있을까 오히려 의문이 드는 핸드폰은 마법사처럼 뚝딱 김치죽을 대령한다. 쌀이 너무 많이 들어가 옛맛을 살려내지 못한 김치죽이지만 그런대로 약을 먹어도 좋을 만큼 기운을 돋게 해 주었다.
몸이 아플 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기처럼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다시 땅 속으로 가라앉듯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가도 잠 깨면 무엇을 먹어볼까 생각하게 되었다. 마당에 넙죽이 엎드려 꼬리를 흔드는 누렁이를 놀려가며 먹던 식어빠진 호박죽이 먹고 싶어졌다. 수발 들 사람이 없어도 전화 한 통으로 계절에 상관없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참 편한 세상에 사는 게 맞나 보았다. 아쉽다면 고운 찹쌀가루를 섞어 끓인 호박죽이 값싼 밀가루를 풀어 끓인 호박죽만큼 맛나지 않다는 거였다.
점점 입덧을 하는 임산부인지 환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먹을 것을 찾게 되었다. 봄볕에 쪽마루에 걸터앉아 먹던 동치미 국물에 김치전이 생각났다. 사 먹는 음식이라 그런지 천천히 곰팡이가 피고 있는 김칫독에서 꺼낸 묵은 김치 맛이 나지 않는 게 흠이었다. 이번엔 감자가 뭉그러지도록 끓여낸 수제비가 먹고 싶어졌다. 배달된 음식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끓여낸 수제비 맛을 흉내내기를 바라던 게 욕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음식인들 추억의 맛과 비교해 비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엇비슷한 음식 덕분에 몸에 붙은 불덩이가 서서히 꺼져갔다.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아마도 병과의 싸움일 것이다. 여러모로 이리저리 도움이야 받겠지만 스스로 이겨내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 한 일어서기 힘든 것이 병과의 싸움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그 자리를,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병과의 싸움에서 힘이 되어주는 것이 음식만 한 것은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아플 때도 어미인 내가 해줄 수 있던 것은 조금이라도 힘을 낼 수 있게 뭔가 해 먹이려 애쓰던 일이었다. 아이들 대신에 아프게 해 달라며 평소에는 찾지도 않던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애타게 불러가며 기도를 하였지만, 역시 힘이 되었던 것은 ‘이것은 좀 먹을까? 저것은 좀 먹을까’ 하며 정성 들여 만들었던 음식에서 얻은 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앓이를 하는 사이 봄이 도둑처럼 들었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바라보는 놀이터에는 봄꽃이 활짝 피어있다. 여태껏 때가 되면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 봄꽃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몇 날 며칠이고 아파하며 살갗을 찢어내는 산고를 겪어냈다니, 알아주지 못한 마음이 미안해졌다.
사람 마음 참 요사스럽기 그지없다. 제 몸이 아파봐야 남의 마음도 바라보게 되니 말이다. 봄나무 가지에 물이 오르듯 열병을 앓고 나니 나 또한 이봄 연분홍 꽃으로 피어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