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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Aug 13. 2022

달팽이처럼 걷다

비에 씻긴, 초록이 더 짙어지는 날입니다. 나무도 잠시 따가운 햇빛으로부터 벗어나 그러할까요? 바라보는 시선이 한결 너그러워집니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 잠드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장면을 묘사하는 어느 광고가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지극히 공감하는,

농처럼 "집  밖은 위험해"라며 집순이인 저를 콕 집었나 싶은, 카피라이터가 참 용하기도 합니다.


심심함만이 아닌, 외로움까지 동반한 적요가 허기로 느껴져 껌 씹듯 티브이를 틀어 놓습니다. 그러다 그녀들을 만났습니다.


삶이 늘 앞뒤가 맞는 건 아니겠지요. 예측불허, 그러하니 두렵고 불안한  내일이겠지요. 그런데 그녀들은 마치 그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전사들 마냥 당당하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합니다. 보는 이에게  그 고비를 넘어선 자들의 편안함과 여유를 전염시키고 맙니다. 썩 괜찮은 전염이지요.


젊은 날엔 젊은이답게 선망의 대상이 있었겠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할 수 있으면 건강하고 곱게 나이 들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 이면에는 늙으면 다 똑같다는 생각도 숨어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의 프로에 나오는 네 여자분을 보면서, 참 사는 게 똑같구나 하는 보편성에 위로를 받게 됩니다. 어찌 보면  68세에 처음으로 밥솥을 사용해본다는 혜은이 님이 참 화려하게 살았다 부럽기도 하지만, 반면에 또 그렇게까지 바쁘게 살았구나 하는 안쓰러움을 어쩌지 못합니다. 화려함 뒤에 몇 번의 결혼 실패와 가슴에 아들을  먼저 묻은 박원숙 님의 아픔은 또 얼마나 클지, 감히 상상하기도 죄스러워 못하고 맙니다. 다른 출연자들도 기타 등등 사연이 많겠지요. 그러고 보면 뒤집어 까도 별거 없는 나의 삶에 무게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삶의 무게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행운권 추첨의 기회가 올 때마다 난 그런  운은 없어하며 살았습니다. 언제나 행운은 나를 비켜간다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큰 사고 없이 무난하게 살아온 내 삶이 참 행운이 아니었나, 깨닫게 되네요.  그러고 보면 원망할 것보다 감사할 것이 많이 남아 있네요.  


그렇습니다. 가장 큰 행운은 잿팟처럼 터진 화려함이 아니라 별 탈 없이 보낸 하루하루가 행운이었네요.  


가만히 손을 내주고 또 내민 손을  편안히 잡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웃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네요. '웃프다'는 것이 이런 거 겠지요.


나의 언어는 울음

말보다 눈물이 앞서 걷는다


불쑥불쑥 노크도 없이

아무 때고 찾아드는 질서의 배반

말끝만 스쳐도 칼 베어져

껍질을 벗고 알맹이를 드러내었다


잦아질 듯 잦아질 듯 이어져

숨어 들 빈관을 둘러메고

달팽이처럼 더디도 걷는다


울다가

울음에 이유도 잃어버린

낮보다 순한 밤이 되어서야

뒷산 강기슭으로 가 얼굴을 닦고

말간 웃음을 짓는


남은 이야기는

이제

잠들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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