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 닿는 곳마다 온통 꽃이었다. 볕 좋은 거리를 차지한 연분홍 벚꽃이며 틈만 나면 낮은 담장을 넘어서려는 노란 개나리, 건물과 건물 사이를 비집고 불쑥불쑥 고개를 쳐든 새하얀 목련이 분명, 도시에도 봄이 찾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찾아온 것이다. 봄은 내게 있어 은근히, 다시 한번 꽃처럼 피어보고 싶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계절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해마다 겨울이면 거르지 않는 막연한 앓이도, 따사로운 봄빛에 눈 녹듯 녹아 사라지니 그보다 더 좋은 계절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변덕인지 이 찬란한 봄이,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수줍은 듯 연하게 물든, 저 펼쳐진 봄날로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함이 앞서는 것이다.
뻑 하면 심술부리던 허리 디스크를 날카로운 칼끝으로 도려냈을 뿐인데 아무래도 남겨두어야 할 감정선까지 싹둑 잘라 내었는가 보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 아름다운 봄날을, 몇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수채화처럼 묵묵히 바라 보고만 서 있을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잃어버린 새끼고양이처럼 어디고 가서 찾아내야 할 봄이었다. 끙끙거리던 차에 모처럼 봄밤 나들이를 해야 할 핑곗거리가 찾아들었다.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이제 막 겨울잠에서 깬 곰처럼 낯빛이 마저 시들기 전, 울타리 밖을 감행한다.
개미굴처럼 얽히고설킨 지하철은 순조롭게 움직였고, 마법의 양탄자 마냥 넘쳐나는 사람들을 빠짐없이 실어 날랐다. 나도 내가 찾아가야 할 곳 인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하도의 대형 전자 간판 앞에 내려앉아 있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의 문구가 눈빛을 깜빡이며 인사를 해왔다. 사막의 샘이라니, 한참을 머물렀다. 샘을 찾아 나서는 어린 왕자와 조종사처럼 나도 봄날로 들어설 길을 찾아 나서야 할까 보았다.
지난 나의 봄은, 어디로 부터 찾아왔던 것일까.......
언젠가의 봄은, 추위가 누그러지고 햇살이 마당 구석구석을 비출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봄노래로 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았다.
또 어느 봄은, 실컷 만화가게를 오가며 뒹굴뒹굴하던 아랫목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한 어느 날의 봄은 철 모르고 피는 개나리처럼, 새까맣게 눈 쏟아지는 밤에도 꿈꾸던 봄이 있었다.
그뿐이었을까? 북적이던 아이들의 겨울방학이 끝나는 날 찾아왔던 봄날은 또한 얼마나 행복했던가?
밤거리가 가로등 불빛에 곱게 단장한 꽃들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태양빛이 낯설어 느껴지던 고독감이 사라지고 익숙한 편안함이 몰려들었다. 그 풍경 앞에 멈춰 선 마음이 왈칵, 울음을 솟구치게 하였다. 지난날들은 언제나 애잔하게 떠올랐다가 늘 서글픔을 남긴다.
...... 봄인 것이다.
한동안의 이런저런 앓이가 나를 조금 지치게 하였나 보았다. 하지만 날것이 아닌, 세상을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 일게다.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라는 조종사의 말처럼, 어쩌면 이제 나의 봄은 숨바꼭질을 해야 할런지도 모른다.